"이곳을 지나는 이여, 스파르타에 전하라. 우리는 그녀의 법을 지키며 이 자리에 쓰러졌노라고."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리스 도시 연합군과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간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군은 적에게 맞섰으며, 이는 고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공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천여 명의 스파르타인, 테바이인, 테스피아이인의 용기와 희생은 전설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대중문화 속에서 수없이 회자되고 있다.
코린토스 회의
페르시아의 침략 준비는 당연히 그리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481년 늦가을, 여러 그리스 도시들이 코린토스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드물게도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아테네는 과거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페르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강대한 경쟁자인 아르고스가 크세르크세스의 사절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레네, 아르고스, 시라쿠사, 코르키라, 포카이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 주요 도시들이 코린토스의 포세이돈 신전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가장 강력한 도시인 스파르타가 회의를 주재했으며, 아테네와 아이기나 간의 화해를 비롯해 전반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31개 도시가 서약을 통해 페르시아에 맞서는 방어 동맹에 가담하고 병력을 준비했다. 군대의 지휘권은 두 명의 스파르타인에게 맡겨졌다. 보병은 레오니다스 1세 국왕이, 그리스 함대는 에우리비아데스가 담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481~480년 겨울 동안 그리스인들은 작전 계획을 놓고 우유부단했고, 결국 기원전 480년 봄 페르시아군의 테살리아 정복을 저지하지 못했다.
8월, 페르시아군이 피에리아를 침공하는 동안 그리스군은 보이오티아와 중앙 그리스로 통하는 길목을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 거점인 테르모필레를 선택했다. 함대는 에우보이아 섬 북부의 아르테미시온에 진을 쳐 페르시아 함대가 이 진지를 우회하는 것을 막았다. 실제로 페르시아군은 함대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테르모필레(온천이 있어 '뜨거운 문'이라 불림)를 통과하는 유일한 주요 도로를 확보해야 했다. 말리아 만과 산 사이의 좁은 통로는 폭 10미터를 넘지 않는 구간도 있었고, 지그재그 형태로 쌓인 옛 성벽의 잔해가 길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늪지대가 많아 추가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약 7,000~10,000명의 병력과 에우리비아데스의 함대(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선박 부대가 가장 많았음) 사이에는 끊임없는 연락이 이루어졌다.
아르테미시온의 폭풍
테살리아를 떠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남진했다. 보병은 테르마를 출발해 13일 후 트라키스 평원(아소포스 계곡과 안티키라 사이)에 도착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약 10일 후 출발하여 육군과 해군의 도착 시기를 맞추려 했다. 에우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에 직면해 아르테미시온을 떠나 에우보이아 해협을 따라 내려가 칼키스 요충지를 점령했고, 이로 인해 레오니다스는 배후 상륙 공격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이 기동은 페르시아군이 예상보다 더 남쪽으로 진격해 세피아스 곶에 정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곳은 바위가 많고 험준한 해안으로 배를 육지로 끌어올릴 수 없었고, 깊은 수심 때문에 많은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없었다. 3일간의 격렬한 폭풍우로 약 400척의 배가 파괴되고 수천 명이 익사했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크세르크세스가 수적 우위를 유지했음에도 더 이상 육군 호위 임무와 그리스 함대와의 전투를 위해 해군력을 분산 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칼키스에서 에우리비아데스는 자신감을 되찾아 다시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갔지만, 폭풍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의 수적 우위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에우리비아데스와 부관인 코린토스의 아디만토스는 결국 물러섰다.
이때 크세르크세스의 이복형제이자 페르시아 함대 사령관인 아카이메네스는 200척의 함선과 약 4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분견대를 파견해 에우보이아를 외해로 우회하게 했고, 나머지 함대는 세피아스 곶보다 안전한 아페테스 정박지로 이동했다. 이 양동 작전으로 인해 남쪽 에우보이아 해협을 통한 탈로가 차단되었다는 소식과 새로운 정박지 정보를 입수한 그리스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해 페르시아 측 동맹인 이오니아 함대를 공격, 약 30척을 침몰시킨 후 아르테미시온 기지로 돌아왔다. 마침내 또 다른 폭풍우가 몰아쳐 정박 중이던 페르시아 함대에 추가 피해를 입혔고, 아르테미시온의 그리스군은 평소처럼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무사히 보호했다. 특히 이 폭풍우는 에우보이아를 우회하던 페르시아 분견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전투
육지에서 레오니다스의 군대는 협곡에서 진지를 굳건히 지키며 페르시아군을 격퇴했고, 크세르크세스의 정예 부대인 '불멸의 군단(이모탈)'을 포함한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말리아 출신 시민 에피알테스(에우리데모스의 아들)의 배신으로 페르시아군은 아노페아 산길을 통해 그리스군을 우회할 수 있게 되었다.
레오니다스는 그리스군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본대가 질서 있게 철수할 시간을 벌기 위해 300명의 스파르타 호플리테스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기로 결심했으며, 테스피아이 출신 700명의 병사들도 이에 동참했다. 한편 테바이 출신 400명의 전사들(아마도 인질)도 이 최후의 전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기회가 되자 탈영했다.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 국왕을 중심으로 영웅적으로 저항했으나, 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모두 학살당했다. 이 전투는 침략자에 대한 그리스의 저항과 스파르타인의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