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루이 딜레이앙(Jean Louis Delayen, 1921년 3월 16일 ~ 2002년 10월 3일)은 프랑스의 육군 장군으로, 명예레지옹훈장 최고 등급인 대십자장(Grand-Croix de la Légion d'honneur)을 받은 인물이다.
1979년 조르주 플뢰리(Georges Fleury)가 집필한 그의 회고록 『르 바루되르 – 딜레이앙 장군의 4대 전쟁』은 그의 별명과 네 번의 전역을 담고 있다. 그가 참전한 네 개의 전장은 제2차 세계대전,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그리고 차드 내전이다.
유년 시절
1921년 프랑스 남부 생라파엘(Saint-Raphaël)에서 태어난 장 루이 딜레이앙은 해병대 대령인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모로코와 인도차이나에서 보냈다.
1935년 프랑스로 돌아와 라 플레슈(La Flèche)의 국립군사학교(프리타네 나시오날 밀리테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군 경력 – 딜레이앙 장군의 4대 전쟁
제2차 세계대전 (1940~1945)
1940년, 그는 학교를 자진 이탈하고 런던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려 했지만 배를 구하지 못해 결국 모로코에 도착했다. 이후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세네갈 저격병 제6연대(6e RTS)에 배속되었고, 이후 모로코 식민지 보병연대(RICM)로 옮겼다.
RICM 소속 준위로 임명된 그는 1944년 8월 프로방스 상륙 작전과 툴롱 해방에 참전했다. 같은 연대 소속으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지프 4대로 구성된 정찰 소대를 이끌며 연합군의 라인 강 진격 작전, 이른바 '라인 진군'에도 참여했다.
그의 소대는 1944년 11월 13일 로즈노(Rosenau)에서 라인 강에 도달한 최초의 연합군 부대가 되었으며, 딜레이앙은 이곳에서 부상을 입었다. '라인 강에 가장 먼저 도달한 연합군 장교'로서 강물에 소대기를 적시는 그의 사진은 뉴욕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실제로는 재현 촬영 사진이었다).
다음 날 바텐하임(Battenheim)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어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가 의식을 되찾는 기적적인 경험을 했다. 5개월간의 요양 끝에 회복했고, 1944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1945~1955)

1945년, 소위가 된 딜레이앙은 극동 프랑스 원정군(CEFEO) 산하 RICM 부대와 함께 인도차이나로 파병될 것을 자원했다. 두 번째 부상을 입은 그는 1946년 중위로 진급했고, 1947년에는 명예레지옹훈장 슈발리에(기사장)를 받았다.
1948년 프랑스로 귀환한 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정보 장교로 통킹 지역에 복무했다. 이곳에서 북베트남 코만도 내에서 통키노스(Tonkinois) 현지인으로만 구성된 최초의 코만도 부대를 창설하는 업적을 남겼다. 1954년에는 명예레지옹훈장 오피시에(장교장)로 승급했다.
알제리 전쟁 (1955~1962)

1955년 알제리에 도착한 그는 아르제우(Arzew)의 수륙양용 훈련 센터에 배속된 뒤, 모로코 국경에 인접한 네무르(Nemours)로 옮겼다.
그는 북베트남 코만도를 본떠, 해병 코만도 요원들이 감독하는 무슬림 현지인으로 구성된 '야타간(Yatagan)' 코만도 부대를 훈련시켰다.
1959년에는 명예레지옹훈장 코망되르(사령관장)로 승급했다.
태평양 (1962~1965)
1962년 초, 딜레이앙은 타히티 해병보병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3년간 복무했다.
프랑스 본토 (1965~1972)
1965년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처음으로 프랑스 본토에 정식 배속되어 로리앙(Lorient)에 주둔한 '수륙양용 훈련 센터'의 책임자가 되었다.
미국 해병대에서 1년간 퀀티코(Quantico)의 지휘참모대학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하여 오부르 캠프(Camp Auvours)의 제2해병보병연대(2e RIMA) 연대장을 맡았다.
차드 (1972~1977)

1972년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차드에서, 대령이 된 딜레이앙은 차드군 총사령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도 은자메나(N'Djamena)에서 6년간 근무했으며, 1975년에는 명예레지옹훈장 그랑 오피시에(대장교장)로 승급했다.
귀국과 은퇴 후의 삶
1977년, 장 루이 딜레이앙은 준장 계급으로 장성 장교단 제1부에 등록되며 프랑스로 돌아왔다. 파리의 협력부에서 짧게 근무한 뒤, 1978년 6월 예비역으로 전역을 신청했다.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그는 파리 콩코르드 광장 다리 근처에 정박한 선창에서 색다른 은퇴 생활을 보냈다. 이후 미국인 아내와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200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바르주 생라파엘에 안치되었으며, 장례식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참전 군목이었던 하인리히 신부가 집전했다. 딜레이앙 장군의 유언에 따라, 매장식 때 그의 관 앞에는 옛 소속 연대인 RICM과 제2해병보병연대의 해병 병사들이 따랐으며, 해병보병대의 비공식 군가인 '마리 도미니크(Marie Dominique)'가 불렸다.
훈장
세 번의 부상을 입었고, 11개의 종려장을 포함해 총 19회의 전공 표창을 받은 딜레이앙 장군은 마르셀 비가르(Marcel Bigeard) 장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프랑스 장교였다. 1996년에는 명예레지옹훈장 대십자장의 품격에 올랐다.
명예레지옹훈장 대십자장
1939~1945 전쟁십자장 (2회 표창)
해외작전전쟁십자장 (8회 표창)
군사적 가치십자장 (9회 표창)
지원전투원십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