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시라쿠사이 함락: 아크라디네의 약탈과 아르키메데스의 최후

병사들의 충동적인 기세가 제동이 걸리자, 아크라디네에 남아 있던 배신자들은 도망칠 시간과 수단을 얻었다. 마침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 시라쿠사이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마르켈루스에게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오직 자신들과 자녀들의 목숨만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마르켈루스의 답변

마르켈루스는 혼란을 피해 로마 진영에 피난했던 시라쿠사이 사람들을 회의에 함께 참석시킨 뒤 이렇게 답했다. 50년에 걸쳐 히에론 왕에게서 받은 은혜보다, 단 3년 동안 시라쿠사이의 참주들에게 입은 모욕이 더 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악행의 대부분은 죄인들 자신에게 되돌아갔으며, 조약을 저버린 자들은 로마 국민이 요구할 수 있는 어떤 처벌보다 더 잔혹하게 스스로를 벌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3년에 걸쳐 시라쿠사이를 포위한 것은 로마가 노예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신자 지도자들의 멍에와 억압으로부터 이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강조했다. 시라쿠사이는 로마군 안으로 피신했던 자국민들의 본보기에서, 지휘하던 거점을 넘겨준 스페인 출신 장수 모에리쿠스의 예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록 늦었지만 확고했던 시라쿠사이 사람들 자신의 결심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육지와 바다에서 시라쿠사이 성벽 앞에서 감당해야 했던 그토록 긴 저항의 모든 수고와 위험은, 이 도시의 함락으로 겨우 조금 보상받을 뿐이었다.

약탈과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이윽고 마르켈루스는 재무관을 섬으로 보내 왕들의 국고를 확보하게 하고, 어떤 폭력으로부터도 이를 보호하도록 명했다. 도시 자체는 약탈에 내맡겨졌지만, 로마 편으로 넘어섰던 시라쿠사이 사람들의 집 문에는 경비병을 배치해 보호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격노와 탐욕, 잔혹함이 난무하는 그 소란 속에서도, 아르키메데스는 강공으로 무너진 도시의 아우성 속에서, 약탈하러 흩어지는 병사들의 발소리 속에서도 모래 위에 그려 놓은 도형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한 병사의 손에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다. 마르켈루스는 이 죽음을 깊이 애석해하며 그의 장례를 주관했고, 그의 친척들을 찾아내 보호했다. 아르키메데스라는 이름과 그의 명성은 그들에게 안전과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것이 시라쿠사이 함락의 주요 사건들이었다. 그곳에서 거둔 전리품은 막대한 전력을 들여 싸운 카르타고에서나 발견될 법한 규모에 필적할 만큼 방대했다.

오타킬리우스의 원호 작전

이 도시가 항복하기 며칠 전, 티투스 오타킬리우스는 80척의 5단 노선(퀸퀘레메)을 이끌고 릴리바이움에서 우티카로 항해했다. 새벽이 밝기도 전에 항구에 진입한 그는 곡물로 가득 찬 수송선들을 나포하고, 우티카 주변 지역을 유린하기 위해 부대를 상륙시킨 뒤 막대한 전리품을 싣고 다시 출항했다. 출발한 지 사흘 만에 그는 곡물과 군수 물자를 가득 실은 130척의 수송선과 함께 릴리바이움으로 돌아왔다.

그는 즉시 이 원조 물자를 시라쿠사이로 보냈고, 그것은 바로 적시에 도착했다. 당시 승자와 패자를 막론하고 도시의 모든 이들이 기근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