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페니키아인, 바다의 베두인: 보라빛 지중해를 지배한 고대 상인들

보라빛 여행자들

환상적인 화물을 실은 배들이 지중해 전역을 누볐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그들의 눈부신 보라색으로 몸을 장식했고, 이집트 파라오들은 그들의 삼나무 기름으로 처리된 수의(壽衣) 속에 미라가 되었으며, 솔로몬 왕은 그들의 장인들의 재능을 빌려 예루살렘 성전과 자신의 궁전을 장식했습니다.

이처럼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민족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동지중해 연안, 오늘날의 레바논과 이스라엘·시리아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정착한 페니키아인들입니다. 셈족 계통인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가나안인들로, 이교도적 관습 때문에 히브리 족장들의 분노를 산 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기록자들조차 그들이 상업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음을 인정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 '케나아니(kena'ani)'는 '가나안인'을 뜻하는 동시에 '상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페니키아인'이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것입니다. '페니키아'는 '보라색의 땅'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귀한 염료를 가리킵니다. 고대의 시인들은 그 보라색의 놀라운 광채를 끊임없이 노래했습니다. 페니키아의 두 대도시 중 하나인 시돈은 알록달록한 색의 구슬, 병, 꽃병, 잔 등 정교한 유리공예품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시돈과 함께 두 번째 도시인 티레에서는 화려하게 자수된 직물, 목재와 상아로 빚은 섬세한 조각품, 비할 데 없이 정교한 금속 공예품이 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10세기에는 티레의 장인들이 금과 은 세공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솔로몬의 성전과 궁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200년경 침략자들에 의해 육지에서의 생계가 위협받자 가나안인들은 바다로 눈을 돌렸고, 그 결과 세계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최대의 해양 세력을 건설했습니다. 전성기였던 기원전 12세기부터 8세기까지 페니키아인들은 해상 무역의 독점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인들은 당시 알려진 세계 전역을 아우르는 방대한 교역망을 구축했으며, 아마도 먼 거래처들과의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알파벳을 창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발명은 훗날 서양 모든 문자 언어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부터 그들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지중해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독점을 깨뜨렸고, 그들의 영토는 차례로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쳐 마침내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페니키아인의 문명과 독창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유리 불기 기술은 그들이 서기 1세기에 발명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보라색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최고의 품위를 상징했습니다. 황제는 보라색 튜닉을 입었고, 원로원 의원은 두 줄의 보라색 줄무늬가 들어간 흰 튜닉을, 귀족들의 망토는 어깨에서 내려오는 좁은 보라색 띠로 장식되곤 했습니다. 보라색 산업은 실제로 로마 제국보다 오래 살아남았고, 중세 초기의 유럽은 페니키아가 이미 사라센의 지배 아래 놓인 지 오래 지난 후에도 여전히 레반트에서 이 귀한 염료를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무렉스, 보라색의 공급자

염색은 티레와 시돈의 주요 산업 중 하나였지만, 특히 티레는 보라색의 품질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기술 비결을 철저히 감춘 듯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귀한 염료는 무렉스(murex)라는 복족류 연체동물이 넘쳐나던 연안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어부들은 홍합과 개구리를 잘게 찢어 덫 바닥에 깔아 무렉스를 유인했고, 해변으로 옮겨진 조개껍데기에서 값비싼 아가미샘을 적출한 뒤, 납 용기에 넣고 가열해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매염제를 넣어 색을 고정했습니다.

직물의 보라색은 물론 입는 인물의 격에 따라 달랐지만, 염료를 공급하는 연체동물의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졌습니다. 무렉스 트룬쿨루스(Murex trunculus)는 보랏빛 보라를 내지만, 또 다른 종의 무색 분비물은 햇빛의 작용으로 밝은 녹색에서 선명한 보라색까지 다양한 단계의 색조—짙은 녹색, 청록색, 연한 파랑, 붉은빛—를 거치며 변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염료 제작소 자리에서 엄청난 양의 빈 껍데기 더미를 발굴했습니다. 건조 보라 7밀리그램을 얻는 데 400마리가, 결정질 보라 1.2그램을 얻는 데 무려 1만 마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면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페니키아의 탐험

페니키아인들은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원자재 공급원을 끊임없이 찾던 탁월한 항해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브롤터 해협 너머 스페인과 모로코 연안에 무역 거점을 세웠고, 카디스 지역에 자주 들러 구리와 납 광석을 실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한 페니키아 선단이 파라오 네카오의 위탁으로 기원전 600년경 아프리카를 일주했습니다. 원정대는 홍해를 출발해 3년 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귀환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럽 항해자들이 희망봉을 돌파하기까지 2천 년이 더 걸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믿기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디테일이 눈길을 끕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서쪽으로 항해할 때 태양이 '오른손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태양이 북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분을 믿지 않았지만, 배가 아프리카를 일주하려면 반드시 적도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현대 지리학자들에게 이 디테일은 오히려 그들의 진술이 진실함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됩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영국 제도까지 갔을까요? 종종 그렇게 말해져 왔습니다. 심지어 아메리카 해안에 도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주장은 일부 멕시코 조각상이 셈족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 그리고 본토 원주민들이 모두 수염이 없었던 반면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염 난 신들을 숭배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대다수 학자들은 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페니키아 갤리선은 때때로 돛을 달기도 했지만 주로 노로 전진했고, 섬에서 섬으로, 또는 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연안 항해가 주류였습니다. 예컨대 스페인의 풍부한 광산으로 이어지는 항로는 밤에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무역 거점들을 따라 이어져 있었습니다. 단계적으로 영국에 도달하거나 아프리카를 일주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광활한 대서양을 횡단하는 일?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