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영국 명예혁명: 제임스 2세 폐위와 입헌군주제의 탄생

영국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은 1688년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 스튜어트를 즉위시킴으로써 영국에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사건입니다. 이 혁명은 절대왕정의 종말을 상징하며, 근대 영국 정치 체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영국 명예혁명: 제임스 2세 폐위와 입헌군주제의 탄생

청교도 혁명: 명예혁명의 배경

명예혁명은 1640년부터 1688년까지 이어진 긴 과정의 연장선에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이를 '영국 혁명'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이 시기는 청교도 혁명, 즉 영국 내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들과 잉글랜드 의회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첫 번째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청교도 혁명은 국왕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의 충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은 이러한 국왕과 의회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잉글랜드의 헌법적 전통에 따르면 의회는 정부 운영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찰스 1세가 가톨릭 교황권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의회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사실상 해체를 포함한 광범위한 조치들을 수용하지 않으면 군주제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1|

국왕과 의회 사이의 이러한 마찰은 종교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회가 청교도 중심이었던 반면 찰스 1세는 가톨릭 성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의회 의원들이 국왕의 권력을 축소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점도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절대군주제 국가였습니다. 결국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그 결과 스튜어트 왕조가 무너지며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국왕의 처형 이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권력을 장악하여 '공화국(Commonwealth)'이라 불리는 독재 공화정을 수립했습니다.

왕정 복고

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부터 1658년까지 독재적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다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뒤를 이었으나 1660년 권력을 반납했습니다. 권력은 다시 의회로 넘어갔고, 의회는 스튜어트 왕조의 복고를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1649년 처형된 국왕의 아들 찰스 2세의 즉위로 왕권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즉위는 찰스 2세가 자신의 권력이 축소된 조건, 즉 절대군주로서 통치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조건은 의회가 확보한 권력이 얼마나 강대해졌는지, 그리고 잉글랜드의 절대왕정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정 복고 이후에도 의회와 스튜어트 왕조 사이의 마찰은 계속되었습니다.

찰스 2세의 통치는 1685년까지 이어졌고, 그의 뒤를 동생 제임스 2세가 이었습니다. 찰스 2세에게 적법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동생에게 돌아갔습니다. 제임스 2세 치세에는 의회와의 갈등이 크게 심화되었습니다. 국왕은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강화하려 했고(잉글랜드 의회는 청교도 중심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왕정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2세가 시행한 조치 중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세금 면제, 정부 요직을 오직 가톨릭 신자에게만 배분하는 것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의회와의 충돌 과정에서 제임스 2세가 절대군주로서 통치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잉글랜드 의회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명예혁명의 전개

영국 명예혁명: 제임스 2세 폐위와 입헌군주제의 탄생
명예혁명으로 국왕의 딸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임스 2세의 행보는 의회의 분노를 샀고, 의회는 절대왕정의 부활 가능성을 깊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의회 의원들이 국왕 퇴위 모의에 나선 결정적 계기는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의 출생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자의 탄생은 가톨릭 왕조가 권력을 영속시킬 수 있다는 커다란 위협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의 두 정당(휘그당(Whig)과 토리당(Tory))의 의원들이 함께 음모에 가담하여 국왕의 딸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와 그녀의 남편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에게 왕위를 넘기자고 제안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의회 의원들처럼 개신교 신자였기에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음모의 결과로 1688년 오렌지 공 윌리엄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이에 제임스 2세와 그의 아내 모데나의 메리는 프랑스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임스 2세의 도피 이후 의회는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 스튜어트를 잉글랜드의 국왕과 여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이 권력 이양은 무혈로 진행되었으며, 영국 역사에 '명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명예혁명의 역사적 의의

명예혁명이 영국 역사에서 지닌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그 나라에서 절대왕정의 몰락을 확정지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는 자유주의 원칙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러한 원칙들은 한 세기 뒤 유럽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잉글랜드의 의회 중심 입헌군주제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통해 공식화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오렌지 공 윌리엄과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국왕과 여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반드시 서명해야 했던 문서로,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세금 인상은 오직 의회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국왕은 사유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금지되며, 언론·표현의 자유를 억누를 수 없다.

권리장전의 규정들은 잉글랜드 신흥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절대왕정에서 비롯된 교리와 특권들이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보았고, 자유주의 가치의 확립을 이에 맞서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자유주의 원칙에 기반한 입헌군주제의 실현은 잉글랜드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 새롭게 정착된 경제 정책 덕분에 이 나라는 다음 세기 산업혁명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 LEVITSKY, Steven; ZIBLATT, Daniel.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는가(How Democracies Die)』. Rio de Janeiro: Zahar, 2018, p.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