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라 개요
메가라(Megara, 고대 그리스어: τὰ Μέγαρα)는 그리스 아티카 지방에 속한 도시로, 메가리스 지역의 중심지입니다. 코린트 지협의 동쪽 끝, 코린트와 아테네 사이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설상의 왕 니소스(Nisos)의 이름을 따서 원래는 '니사이아(Νίσαια)'라고 불렸습니다.
역사
도리아인의 정착과 상업의 발달
전승에 따르면, 아테네의 왕 코드로스가 희생된 뒤 아테네에서 쫓겨난 도리아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중앙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육상 교통의 요충지였던 메가라는 빠르게 성장했고, 사로니코스 만과 코린트 만에 각각 항구를 두어 주요 상업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활발한 식민 활동과 참주정의 혼란
기원전 730년부터 550년경까지 메가라는 매우 활발한 식민 활동을 벌였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에는 아스타코스, 칼케돈, 비잔티움을, 비티니아에는 폰투스 헤라클레아를, 시칠리아에는 셀리누스와 메가라 히블라이아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00년경 참주 테아게네스가 집권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빠졌고, 참주정이 붕괴된 후에도 정치적 소용돌이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흔적은 당대 시인 테오그니스의 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메가라는 서쪽 영토를 코린트에, 살라미스 섬은 아테네에(기원전 570년경) 빼앗기며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메가라 칙령
기원전 500년 무렵 메가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하여 페르시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린트와의 국경 분쟁에 휘말리자, 메가라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결별하고 아테네의 보호를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기원전 460년). 아테네는 코린트 만에 면한 메가라의 항구를 장악했고, 기원전 459년에는 장성(長城)을 쌓아 도시와 항구를 연결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47년 코로네아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보이오티아군에게 패배하자, 메가라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아테네 수비대를 몰살시켰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테네는 메가라 선박을 아테네 제국의 모든 항구와 정박지에서 배제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른바 '메가라 칙령'은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메가라는 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가 신속하게 구원군을 이끌고 온 덕분에 함락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메가라에는 과두정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흥망성쇠
기원전 4세기 메가라는 대체로 전쟁의 소용돌이 밖에 있었으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맞서 아테네와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307년에는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도시를 공략하여 약탈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탄원 덕분에 자유는 지킬 수 있었지만, 메가라는 이 재난에서 결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251년, 아라토스의 권유로 메가라는 아카이아 동맹에 가입했습니다. 기원전 223년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3세가 코린트를 점령하자 메가라는 동맹국들과 단절되었고, 아라토스의 동의 아래 보이오티아 동맹에 합류했습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전쟁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기원전 229년 데메트리오스 2세가 사망하자 다시 아카이아 동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24년 아라토스의 정책 전환에 따라 메가라는 테베로 복귀하여 마케도니아 진영에 합류했습니다. 마침내 기원전 192년 메가라는 다시 아카이아 진영에 섰고, 이에 분노한 보이오티아인들이 메가라를 포위했지만 필로포이멘이 이끄는 아카이아군이 이들을 격퇴했습니다.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전쟁 중 로마 장군 메텔루스에게 함락되면서, 메가라의 독립 도시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문화와 유산
메가라는 시인 테오그니스와 철학자 에우클레이데스(메가라 학파의 창시자), 스틸폰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한때 주교좌가 있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성 제롬)는 자신의 서신에서 메가라인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속담을 전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집을 짓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