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30년이란?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 유럽은 완전히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파괴는 막대했고, 인프라는 폐허가 되었으며, 통신과 교통망은 두절된 상황이었습니다.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 중과 다름없이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식량 배급 제한도 계속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에서는 1945년 11월에 폐지되었던 빵 배급표가 같은 해 12월에 다시 부활하여 1949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기간: 1945 ~ 1973년
핵심 인물: 장 푸라스티에(Jean Fourastié)

전개 과정
그러나 전후 재건은 1차 세계대전 이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구대륙의 부흥을 돕기 위해 마련된 미국의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 130억 달러 이상의 지원을 제공하며 재건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대전 이후 이어진 베이비붐 역시 눈에 띄는 변화였습니다. 1951년부터 1975년 사이 서유럽의 인구는 무려 5,600만 명이나 증가했습니다.
경제 성장의 속도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프랑스는 1950년부터 1973년까지 연간 약 5%에 육박하는 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경제학자 장 푸라스티에가 명명한 것으로, 이 격동의 발전기를 가리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이른바 '이탈리아 경제 기적') 역시 전쟁의 폐허에서 놀라운 속도로 부흥했으며, 실업률을 최저 수준으로 유지하는 완전고용이 실현되었습니다. 반면 영국은 경제적으로 정체되어 수입마저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은 국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졌고, 소득 재분배와 사회법령 개선(프랑스의 경우 1950년 최저임금 제정, 1956년 유급휴가 3주로 확대)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은 서유럽을 대량소비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가정마다 텔레비전과 자동차를 갖추게 되었고, 여가 지출 역시 크게 늘어났습니다.
성장은 주로 산업 활동과 건설 부문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농업 혁명도 일어나 기계화와 비료의 대량 사용으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아울러 국민 복지를 중시하는 복지국가의 수립과 계획, 국유화, 공공 투자 등 적극적인 공공 정책은 성장을 뒷받침하고 부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결과
- 프랑스의 사회 구조가 변화했습니다. 중산층이 성장했으며, 경제의 3차 산업화(서비스업 중심 전환)가 진행되었습니다.
- 오늘날의 연구는 이처럼 급속한 발전이 남긴 생태적·인간적 피해를 지적합니다. 천연자원의 고갈, 대규모 CO2 배출, 석면에 노출된 노동자들, 핵실험, 이주 노동력의 대량 사용 등도 이 시기를 특징 짓는 어두운 면이었습니다.
-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된 국가들은 성장과 투자의 정체에 고물가가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겪기 시작했고, 1973년의 오일 쇼크는 전후 호황기의 막을 내리며 영광의 30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