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아테네의 대위기: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쿠데타의 시대

기원전 430년은 아테네 쇠퇴의 서막을 여는 해였다. 스파르타와의 재앙적인 전쟁에 더해 장티푸스가 도시를 휩쓸면서 기원전 429년에는 페리클레스마저 목숨을 잃었고, 사기가 꺾인 아테네는 피할 수 없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스파르타 군대의 점령은 기원전 411년 '사백인 정권'의 쿠데타로 이어져 참주정(僭主政)이 부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정권은 곧 전복되었지만, 기원전 404년에는 '삼십인의 참주'라는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왔다. 삼십인 참주는 헬리아이를 폐지하고 아레오파구스의 옛 특권을 되살리며 에클레시아를 단순한 자문 기구로 격하시키는 한편, 권력의 고삐를 자신들의 손에 쥐었다. 극도로 반동적이고 민주주의를 경멸했던 이 체제는 기원전 403년 초 스파르타 점령군이 철수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기원전 4세기: 약해진 도시, 흔들리는 체제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선 아테네는 국력을 잃고 크게 가난해졌다. 아테네 제국은 소멸했으며, 아테네식 민주주의는 더 이상 다른 폴리스에 내놓을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주적 열망의 부흥이 도시를 타고 있었다. 그때까지 헬리아이 배심원(헬리아스트)과 부레(500인 평의회) 의원에게만 지급되던 봉급(미스토스)이 에클레시아에 참석하는 모든 시민으로 확대되면서, 귀족부터 대소 상인, 도공, 항만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시민회의에 몰려들었고, 회의의 주권은 다시는 의심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러한 대중적 성공—본래 귀족 출신 정치가들이 신흥 세력의 요구에 맞서기 위해 고안한 장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은 비판에 직면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곡 『말벌』에서 클레온 치하에서 미스토스가 3오볼로스로 조정된 것을 비판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권력 행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 가난한 이들이 선동가의 논리에 더 취약하다고 보았다. 결국 시민 대중은 여론의 복수심에 휩쓸려 모범적인 인물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 같은 성급한 결정을 내렸고, 이것이 포퓰리즘의 탄생이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지성적 비판이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에게서 특히 가혹한 형태로 처음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체제를 위계화하면서 민주정을 참주정 바로 아래, 즉 귀족정·명예정(티모크라시)·과두정보다 낮은 순위에 두었다.

이러한 내부 비판은 철학적으로 중요했음에도 대중에게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진짜 치명타를 가한 것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한 전 그리스 정복이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데모스테네스조차 막지 못한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패배는 폴리스의 독립, 그리고 기존의 모든 체제의 종언을 고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제도는 기원전 322년에 폐지되었고, 부레만이 '지방 자치회'라는 좁은 역할로 명맥을 간신히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