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치 기관: 에클레시아부터 헬리아이아까지

서론

아테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각 기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330년경 아리스토텔레스와 리케이온의 제자들이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 헌법』이 19세기 말 우연히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1]. 아테네 민주주의는 공식적인 성문 헌법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각 기관의 역할은 명확히 인식되고 서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그 발전 과정은 치밀한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Ekklesia) — 시민 총회

에클레시아는 프뉵스 언덕에서 열린 시민 총회였습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통상 5,000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법률을 표결했습니다. 표결은 손 들기 방식으로 단순 다수결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시민은 발언권(이세고리아)을 가지고 동의안을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직접 민주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의결된 법률은 아고라에 공시되었습니다.

비슷한 절차에 따라 에클레시아는 스스로를 참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매년 한 시민의 추방 여부를 표결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편추방제(오스트라키스모스)입니다. 명칭은 추방하고 싶은 인물의 이름을 적던 도자기 조각 '오스트라콘'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연례 회의는 부롤레우테스와 헬리아스트 관리들의 1년 임기 추첨 회의 다음에 열렸으며, 6,000명의 참석을 요구하는 소위 '6,000명 정족수'가 필요했습니다. 이 관행은 수십 명의 아테네 주요 정치인들이 희생된 뒤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브울레(Boulē) — 오백인 평의회

브울레는 그리스 여러 폴리스의 평의회를 가리키는 일반 명칭입니다. 아테네에서 브울레는 클레이스테네스 개혁 이후 부족마다 50명씩 총 500명의 위원(부롤레우테스)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백인 평의회'라고 자주 불렸습니다.

부롤레우테스는 각 데메스가 작성한 30세 이상 자원 시민 명단에서 제비로 추첨되었고 매년 교체되었으며, 한 시민은 평생 최대 두 번까지만 위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평의회는 상설 기관으로 운영되었고, 의장직과 업무 조율은 프리타네스가 담당했습니다. 각 부족은 연간 10분의 1(35~36일) 동안 프리타네이아, 즉 상근 당번을 맡았습니다. 브울레의 주요 업무는 시민들이 제출한 입법 제안을 접수하고 법률 안건을 준비하여 에클레시아를 소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브울레는 아고라에 있는 톨로스와 인접한 건물인 부롤레우테리온에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관리들(Magistrates)

관리들은 행정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즉,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법의 집행을 담당했습니다. 그중에는 군대를 지휘하며 선거로 선출되고 재선이 가능한 10명의 장군(스트라테고이), 그리고 에클레시아 시민 중 제비로 뽑혀 우리의 내각에 해당하는 역할을 한 9명의 아르혼(문자 그대로 '지배자')이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반드시 집단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했으며, 결코 개별적으로 행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관리와 사절은 임기가 끝나면 감사 심사를 받았는데, 이를 통해 아테네 사람들은 관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동시에 참주적 전횡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도키마시아(Dokimasia)는 제비 추첨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예정된 관리들이 거치는 사전 자격 심사였습니다. 이 심사를 통해 후보자가 실제 시민인지, 최소 연령 요건을 충족하는지, 해당 직책을 맡은 적이 없는지, 그리고 그 직을 맡을 자격이 되는지 확인했습니다. 심사는 에클레시아 앞, 헬리아이아 앞, 혹은 양쪽 모두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아레오파고스(Areopagus)

아레오파고스는 민주주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고 신화적 기원을 지닌 정치 기관으로, 본래 목적은 '법률을 지키는 것', 즉 헌법 질서의 준수를 보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광범위한 사법 권한을 가졌습니다. 구성원은 옛 아르혼들, 즉 그 직위가 제비 추첨으로 넘어가기 전의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 출신들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아테네 기관 중 가장 덜 민주적이고 가장 귀족적인 기관으로 여겨졌습니다. 명칭은 아레오파고이트들이 좌정한 아레스의 언덕에서 따왔습니다. 도시의 중심인 아고라 밖에 위치한 점은 강한 상징성을 지니는데, 범죄에는 문자 그대로 시민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드라콘의 개혁으로 시민들은 직무 수행 중 자신에게 피해를 준 관리를 아레오파고스에 고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솔론의 개혁은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여, 이 기관은 현자들의 평의회처럼 기능하며 도시를 내부의 위협(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겨냥한 음모까지 차단함)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레오파고스는 어떤 다른 기관에도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과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레오파고스가 쥔 권력은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에피알테스와 테미스토클레스는 협력하여 이 영향력을 축소하고 그 권한을 에클레시아, 브울레, 새로 생긴 헬리아이아 법정에 넘기려 했습니다. 그 결과 462년 이후 아레오파고스는 정치 권력을 상실하고, 살인죄를 심판하는 존경받는 기관이자 신성한 사무를 담당하는 기구로 남게 되었습니다.

헬리아이아(Heliaia) — 민중법정

이 민중 법정은 항상 30세 이상의 시민 6,000명으로 구성되어, 매년 제비로 추첨되어 헬리아스트가 되는 500명씩의 열 개 계급(나머지 1,000명은 예비 인원)으로 나뉘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검찰'에 해당하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고발은 언제나 시민 개인의 발의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발자는 유죄 판결 시 벌금의 일부를 정의를 위해 노력한 대가로 받았기 때문에, 고발을 직업으로 삼는 시민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시코판트(sycophant)'입니다. 이 제도의 남용을 막는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도시를 분열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귀족파가 새 체제를 공격하는 강력한 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복잡한 절차를 통해 사건 성격에 따라 더 많거나 적은 수의 헬리아스트가 심사 관리의 감독 아래 제비로 선정되어 각 재판에 배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적 재판에는 통상 201명, 특별한 경우 401명의 배심원이 착석했습니다. 공적 재판에는 501명, 1001명, 심지어 1501명의 배심원이 참여했습니다. 재판 업무는 절차 법전도 형법전도 없어 법률 해석에 큰 재량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습니다(그렇다고 법률 자체의 수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판결은 최종적이며 즉시 집행되었으므로, 헬리아이아 법정이 차지하는 정치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매년 200회의 회의가 열렸으며, 각 회의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관리가 주재했습니다. 에페테스 법정(51명)은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곳으로, 사건 유형에 따라 네 곳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 프리타네이온: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것(사물, 동물)을 심판
  • 팔라디온: 과실치사와 메토이코이 및 노예 관련 사건을 심판
  • 델피니온: 정당방위를 심판
  • 프레아티스(해변): 유배 중 살인을 저지른 망명자를 심판 — 이때 피고는 먼바다의 배 위에 서 있었음

에클레시아와 헬리아이아의 균형과 경쟁

시간이 지나면서 헬리아이아 법정이 에클레시아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416년, 전년도에 마지막으로 시행된 도편추방제를 대체하기 위해 '그라페 파라 노몬'(ἡ γραφή παρά νόμων, 위법 소추 절차)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절차는 모든 시민이 에클레시아에서 통과된 법률이든 제안 중인 법률이든 헬리아이아 법정에 심사를 청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법정이 해당 법률이 도시의 기본법에 반한다고 판단하면, 그 법은 무효화될 뿐만 아니라 그 작성자와 채택(또는 제안) 당시 토론을 주재한 에피스타테스도 무거운 벌금에 이르는 처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법정이 제안 중인 법률을 헌법에 부합한다고 판결하면, 에클레시아의 재심의 없이 그대로 채택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라페 파라 노몬은 헬리아이아에 단순한 헌법 심의 기관 이상의 역할을 부여했는데, 이는 이전에 아레오파고스가 맡았던 역할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헬리아이아는 브울레와 에클레시아와 함께 입법권을 공유하는 공동 입법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원전 355년부터 정치적 투쟁의 무대는 프뉵스가 아니라 '법정'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