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Lucius Septimius Severus Pertinax, 146년 4월 11일 ~ 211년 2월 4일)는 193년부터 211년까지 재위한 로마 황제이다. 그의 즉위와 함께 세베루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로마 혈통이 아닌 속주 출신 인물들이 제국의 권력에 진출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출생과 가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오늘날 리비아 해안에 위치한 트리폴리타니아의 도시 렙티스 마그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쪽으로는 1세기에 로마 시민권을 얻은 리비코-포에니 계열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풀비아 피아 쪽으로는 시민권을 취득한 이탈리아 이민자와 원주민의 결혼으로 이어진 집안이었다. 양쪽 모두 지역 유력 가문으로, 친할아버지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렙티스 마그나가 식민도시로 승격될 때 초대 둠비르(duumvir)가 되기 전 해당 도시의 프라이펙투스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에메사(현 시리아)의 대제사장의 딸 율리아 돔나와 재혼하여 두 아들 게타와 카라칼라를 두었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그를 작고 마른 체구에 활기차면서도 과묵한 인물로 묘사했다.
관료 경력
18세에 렙티스 마그나를 떠나 로마로 간 그는 여러 문관 및 군직을 역임했으며, 리옹을 중심으로 한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에서 근무하던 시절 두 아들이 루그두눔(현 리옹)에서 태어났다. 191년에는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아일리우스 라에투스의 지원을 받아 상판노니아 속주 총독(레가투스)에 임명되었다.
황제 즉위
193년, 상판노니아의 중심지 카르눈툼에 머물던 중 콤모두스와 페르티낙스 황제가 연달아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뉴브 강 유역에 주둔하던 그의 군단은 곧바로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같은 시기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역시 반기를 들며 제국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193년 6월 1일 원로원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길이 열렸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6월 9일 군단을 이끌고 로마 성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근위대를 진영의 연회로 불러낸 뒤, 예장한 근위병들을 자신의 병사들로 포위해 무장을 해제시키고 페르티낙스 살해범들을 처형했다. 이후 근위대 전원을 해직하고 속주 출신 병사들로 완전히 교체함으로써 근위대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한편 그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와 194년 집정관직을 부여하는 회유책으로 일시적으로 후방을 안정시키는 수완을 보였다.
권력 장악: 니게르와 알비누스 제거
193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경쟁자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연파했고, 결정적 최종 전투는 194년 봄 이수스에서 벌어졌다. 권력 기반이 공고해지자 그는 페르티낙스라는 이름을 되찾고,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자칭하며 네르바 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실제로는 조작된 것)를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했다.
195년에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고, 같은 해 말에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public enemy)으로 선포했다. 196년 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영국 해협을 건넜으며, 결정적 전투는 197년 2월 루그두눔(리옹) 근교에서 벌어졌다. 셉티미우스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 후 알비누스는 도주하다 자결했고, 셉티미우스는 그의 시신에서 옷을 벗겨 말발굽에 짓밟게 했다. 잘린 머리는 로마로 보내졌고 시신은 론강에 던져졌다. 유족은 처음에는 안전했지만, 미망인과 아들은 훗날 살해당했다. 알비누스를 지원했던 원로원 의원 29명 역시 숙청되었다.
파르티아 원정과 메소포타미아 속주 신설
197년부터 199년까지 파르티아에 대한 새로운 정복 전쟁이 성공을 거듭하며 메소포타미아 속주가 신설되었다.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한 그는 남녀노소 약 10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파르티아의 국고를 탈취했다. 이후 5년에 걸쳐 새 속주의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
그는 동방을 순방하며 이집트를 방문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라에 경의를 표했고, 나일강을 따라 테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로마로 돌아온 것은 202년이 되어서였다.
후계 문제와 플라우티아누스 숙청
로마로 귀환한 그는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개인적 친분이 깊었던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딸 플라우틸라를 아들 카라칼라에게 시집보냈으나, 부부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205년, 아마도 카라칼라의 사주로 백인대장들이 플라우티아누스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를 암살하게 했고, 플라우틸라는 리파리 제도로 추방되었다.
브리타니아 원정과 최후
208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데리고 브리타니아 속주로 건너가 캘레도니아인과의 전쟁에 나섰다. 209년까지 여러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없었다. 제국 북방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약 130km에 달하는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대대적으로 보강했다.
통풍으로 쇠약해진 그는 요크로 물러나 211년 2월 4일,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건축 사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제국 곳곳에 웅장한 건축물을 남겼다.
- 로마: 팔라티노 언덕 남면을 일곱 주요 천체(행성과 태양, 달)에 바치는 기념 분수 셉티조디움으로 꾸몄고, 황궁에 새로운 날개를 추가했다. 또한 훗날 아들 이름을 딴 카라칼라 욕장의 공사를 시작했다. 콤모두스 통치 말기 화재로 훼손된 많은 건축물도 복구했는데, 옥타비아 회랑, 폼페이우스 극장, 아르쿠스 네로니아니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평화의 신전에는 로마 전역을 새긴 거대한 축척 지도인 포르마 우르비스(Forma Urbis)를 설치했다.
- 렙티스 마그나: 고향에도 세베루스 포룸, 세베루스 바실리카, 항만 시설 등 뛰어난 기념물들을 헌상했다.
제국 운영의 개혁
그는 로마 제국의 행정 구조를 바꾸는 조치들을 단행했다.
- 황실 우편 제도(쿠르수스 푸블리쿠스)에 군대 보급품 수송 업무를 위탁했다.
- 기존에는 황제의 전속 권한이었던 법률 사건 항소심 처리를 근위대장(praefecti praetorio)에게 이관했다. 이 개혁으로 근위대장은 민사 영역에서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 평민(플레브스)을 위한 전통적인 밀 무료 배급에 더해 올리브유 무료 배급 제도를 도입했다.
칭호 변천
- 146년 4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로 출생
- 193년 6월, 황제 즉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 195년: 피우스(Pius) 칭호 추가
- 195년, 아디아베네족과 아랍인에 대한 승리 후: 아라비쿠스 아디아베니쿠스 추가
- 198년, 파르티아 정복 후: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추가
- 209년, 캘레도니아 정복 후: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추가
- 211년 사망 시 전체 칭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피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아라비쿠스 아디아베니쿠스 파르티쿠스 막시무스 브리타니쿠스 막시무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호민관 권력 19회, 임페라토르 15회, 집정관 4회,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