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카르나소스 영묘란?
할리카르나소스 영묘(그리스어: Μαυσωλεῖον, 마우솔레이온)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 카리아의 왕 마우솔로스(기원전 353년 사망)의 무덤으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기념비는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 덕분에 고대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대형 무덤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마우솔레움(mausoleum)'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영묘인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을 들 수 있습니다. 영묘는 현재 튀르키예 남서부의 보드룸(Bodrum)에 해당하는 자리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카리아와 마우솔로스 왕
카리아는 원래 페르시아 제국에 종속된 속주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실상 자치 상태에 이른 지역이었습니다. 마우솔로스 왕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대부분을 장악한 뒤 수도를 할리카르나소스로 옮겼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페르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색채가 짙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수도를 가꾸고 요새화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는데, 특히 극장과 전쟁의 신 아레스를 모신 신전을 세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묘의 건축
스트라본과 파우사니아스 등 고대 기록에 따르면, 마우솔로스의 누이이자 미망인인 아르테미시아 2세가 오빠를 기리기 위해 탁월한 기념물을 세우기로 결정했다고 전합니다. 다만 그녀가 왕위를 이어받아 다스린 기간이 겨우 2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마우솔로스 생전에 공사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묘는 아르테미시아 2세가 죽고 1년 뒤인 기원전 350년경 완공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공사를 마무리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그녀의 동생일 수도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일 수도 있으며, 애초에 완공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영묘 건설에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아르테미시온)이라는 또 다른 불가사의의 재건축을 이끌었던 건축가 스코파스가 설계를 맡았고, 조각가 레오카레스, 브리악시스, 티모테오스가 참여했습니다.
영묘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받침대 위에 세워졌으며, 주변은 신성한 구역(템메노스, τέμενος)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에는 프로필레이온(propylaion, 기념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받침대 위에는 36개의 기둥이 늘어서 있었고, 이 기둥들은 24단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을 받쳤으며, 그 정상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쿼드리가)가 놓였습니다.
영묘는 12세기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었으나, 이후 관리 부재로 서서히 퇴락해 갔습니다. 15세기에는 호스피탈러 기사단이 이곳을 채석장처럼 활용해 할리카르나소스 옛 아크로폴리스 위에 성 베드로 성(현 보드룸 성)을 짓고 도시 방벽을 보수하는 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
1857년,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토머스 뉴턴(Charles Thomas Newton)은 비트루비우스와 대플리니우스 같은 고대 문헌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현장에서 얻은 조각들을 해석하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영묘의 위치를 최초로 확인했습니다.
그는 현지 여건에 맞게 발굴 방식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영묘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을 모두 사들일 만큼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참호 대신 터널을 파는 방식으로 건물의 외곽 경계를 찾아냈습니다. 네 개의 모서리를 확인한 후에는 더 깊이 조사하고 싶은 필지만 선별하여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뉴턴은 수많은 건축 및 조각 유물을 출토시켰습니다. 그중에는 스코파스가 제작한 동쪽 프리즈 판석 4점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유물들과 함께,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거상이 올려져 있던 4두마차의 기념비적인 바퀴 하나가 현재 모두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뉴턴은 제네바, 콘스탄티노플, 로도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영묘의 다른 조각들도 확인하여 박물관으로 모았으며, 이 과정에서 학예사로서의 그의 업무는 고고학자의 발굴 작업과 맞닿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