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등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마지막 걸작
알렉산드리아 등대(파로스 등대)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가장 늦게 지어진 건축물로, 기원전 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약 17개 세기에 걸쳐 항해자들에게 길을 밝혀 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활용된 등대였습니다. 공사는 기원전 297년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정확한 연도는 전해지지 않음) 약 15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사업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착시했지만, 그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통치 시기에 비로소 완공되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위치
등대가 세워진 장소는 파로스 섬 끝자락으로, 현재 그곳에는 15세기 말에 축조된 카이트베이 요새(Fort Qaitbay)가 서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요새 역시 일부는 등대에 속했던 고대 석재를 재활용해 지어졌습니다.
4세기에서 14세기 사이 이 지역을 여러 차례 강타한 대지진들은 등대를 점차 훼손시켰고, 결국 1303년에는 거의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1349년, 저명한 무슬림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등대에 다녀왔을 때 [...] 내부가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출입문에 이를 수도 없었다."
등대는 이러한 폐허 상태로 방치되다가, 15세기 말 이집트의 마지막 맘루크 통치자 중 한 명인 술탄 알아슈라프 사이프 앗딘 카이트베이가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성채를 건설하도록 명령하면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었습니다.
건축가 소스트라토스와 헌사 논쟁
오랫동안 등대의 건축은 크니도스 출신의 소스트라토스(Sostratos of Cnidus)가 지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의 기록을 통해 전해집니다. 스트라본은 등대 벽면에 납판에 새겨 넣었다는 다음과 같은 헌사(獻辭)를 인용합니다.
"Σοστρατος Δεξιφανου κνιδιος θεοις σωτερσιν υπερ των πλωιζομενων"
(크니도스 출신 데시파네스의 아들 소스트라토스가 항해자들을 위해 구원의 신들에게 이 기념물을 바친다)
그런데 이 헌사의 수신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신들'이 선원들의 수호신인 디오스쿠로이 형제, 즉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리스어로 구원자를 뜻하는 소테르'라는 별칭을 지닌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해졌습니다. 한편 학자 장이브 앙프뢰르(Jean-Yves Empereur)는 기원전 3세기 시인 포시디포스의 에피그램을 근거로, 소스트라토스가 실제로 바친 것은 등대 자체가 아니라 등대 꼭대기를 장식한 조각상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등대의 역할
등대는 물론 알렉산드리아 연안의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지만, 앙프뢰르에 따르면 정치적 선전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시 전체가 과도하게 개발되고 있었고, 등대는 그 도시의 상징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실제로 '등대'를 뜻하는 단어(phare, pharus)가 파로스 섬의 이름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이런 종류의 건축물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으니까요. 대도서관이나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처럼 등대만큼 유명한 건축물이 알렉산드리아에 더 있었음에도, 등대는 도시의 상징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해안선이 비교적 평탄한 이 지역에서 등대는 선원들에게 확실한 기준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등대는 흰 돌로 지어졌는데, 이는 물에 닿으면 단단해지는 특성을 지닌 현지 산 석회암('멕스 백석')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등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스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등대 부지 위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도 같은 방식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외관과 규모
앙프뢰르는 등대를 묘사한 회화·모자이크 등 각종 도상 자료와 함께 스트라본, 플루타르코스, 아부 하미드 알안달루시, 이븐 바투타 등의 문헌을 분석하여 상당히 정밀한 복원도를 완성해 냈습니다. 특히 그는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 사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조된 주화를 면밀히 검토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40km 떨어진 타포시리스 마그나의 기원전 2세기 고분 위에 등대를 축소 복제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에도 착안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 등대는 세 층 구조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완만하게 피라미드처럼 좁아지는 정사각형 기단
* 팔각형의 중간층 기둥
* 꼭대기에 조각상이 세워진 작은 원통형 탑
전체 높이는 약 135미터에 달했으며, 가시 거리는 약 50킬로미터에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단부는 한 변 약 30미터, 높이 약 70미터로 추정되며, 아치형 경사로를 통해 출입했습니다. 내부 경사로 주변에는 등대 관리 요원의 숙소나 연료 저장용으로 사용된 방 50여 개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것이 창문들이 비대칭적으로 배열된 이유입니다. 창문들은 실제로 내부 경사로의 축을 따라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경사로는 연료를 운반하던 가축이 오갈 만큼 넓었으며, 꼭대기에는 높이 2.30미터의 난간이 둘린 테라스로 이어졌습니다. 테라스의 네 모서리에는 나팔을 부는 트리톤 조각상 하나씩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 층은 팔각형으로, 높이 34미터, 폭 18.30미터였고, 내부 계단이 세 번째 층으로 통했습니다. 최상층은 원형으로 높이 겨우 9미터였으며, 18단짜리 계단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등대 꼭대기의 조각상은 누구인가
등대 꼭대기에는 아직 정체가 확증되지 않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후보로는 제우스, 포세이돈, 헬리오스가 거론됩니다.
1. 제우스 설: 포시디포스의 시에는 이 조각상이 제우스상이라고 나오며, 기원전 3세기 전반기에는 실제로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세기 유리 인태글리오(음각 보석)에도 왼손에 창을, 오른손에 잔을 든 제우스가 올려진 등대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등대는 파로스 섬에 각각 신전을 두었던 이시스 파리아와 포세이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제우스상은 로마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포세이돈 설: 반면 아프가니스탄 바그람에서 발굴된 기원전 2세기 유리 잔에는 왼손에 노를 든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포세이돈으로 해석됩니다. 이 신은 등대 보수 공사를 언급한 기원후 5세기 문헌에도 등장합니다.
3. 헬리오스 설: 539년 제작된 모자이크에는 헬리오스가 올려진 등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세 조각상이 차례로 교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즉,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조이자 아몬-제우스로 숭배되던 제우스상이 먼저 세워졌고, 로마인들이 들어온 뒤 라고스 왕조를 연상시키는 이 조각상을 철거하고 등대의 본래 기능인 '항해자 보호'에 잘 맞는 포세이돈상으로 교체했으며, 이후 고대 말기에 보편화된 신이었던 헬리오스상으로 다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반례가 있습니다. 391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를 포함한 로마 영토 내 이교 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 칙령이 상당히 철저히 시행되어, 사라피스 신전이 파괴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로마의 기독교화 이후에는 도시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나 그리스도의 조각상이 등대를 장식했을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반면 확실한 사실 하나는, 9세기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이 탑 꼭대기에 모스크를 설치했다는 점입니다.
한편 카이트베이 요새 기슭의 수중에서는 두 개의 거상(巨像)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는 파라오 차림의 프톨레마이오스상이고, 다른 하나는 이시스상입니다. 두 조각상은 항구로 진입하는 선원들에게 보이도록 등대 앞에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프톨레마이오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시스상은 사후 신격화된 그의 아내 아르시노에 2세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중 발굴의 역사
카이트베이 요새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이 체계화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입니다. 수중 석재 블록의 존재는 18세기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에야 시작되었고 그 이전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등대의 모습은 고대 문헌만큼이나 전설에 기반한 그림이었습니다.
등대(부지가 아닌 건물 자체)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연구는 20세기 초 그리스로마 박물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헤르만 티어쉬(Hermann Thiersch)의 작업입니다. 그는 당시까지의 모든 사료를 목록화하여 여러 시기별로 비교적 충실한 등대의 모습을 재구성했습니다. 티어쉬는 등대의 기초가 카이트베이 요새의 별관(keep)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았고, 1916년경 프랑스 엔지니어 조데(Jondet)가 실시한 측량이 이 가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군사 시설이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등대의 유적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수중 발굴이 시작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중 탐사는 1960년대 초, 알렉산드리아 출신 다이버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카멜 아불 사다트(Kamel Abul Saadat)에 의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는 항구 입구를 최초로 탐사하여 그곳의 거석들을 주목시켰고, 1962년에는 이집트 해군을 설득해 이시스 거상을 인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68년에는 유네스코가 스코틀랜드 고고학자 호너 프로스트(Honor Frost)를 현지에 파견했고, 그녀는 카멜 아불 사다트와 함께 해저 평면도를 작성했습니다. 1975년에는 국제수중고고학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Nautical Archeology)에 이 고대 유적지에 관한 최초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등대 기슭에 대형 콘크리트 블록이 매몰되는 불운한 사고가 일어나자, 고대유물국은 장이브 앙프뢰르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연구센터(CEAlex)와 그의 다이버 팀에 요새 주변 해저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1994년 이후 3,000개 이상의 블록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3분의 2 이상이 건축 부재입니다. 일부 블록은 풍선을 이용해 수면 위로 인양되었지만 작업이 워낙 어려워 조사 속도는 더딘 편입니다. 그럼에도 CEAlex는 유적지 전체를 완벽하게 지도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제 남은 과제는 블록 자체에 대한 연구입니다.
현장에서는 수많은 기둥 파편이 발견되었지만, 기둥 받침과 머리 장식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이는 후대 건축물(모스크, 저수지 등)에 재활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로 수입된 라메세스 2세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기둥 여섯 개, 세소스트리스 2세와 프삼메티쿠스 2세 등 여러 왕조에 걸친 스핑크스 28점, 세티 1세의 서명이 새겨진 오벨리스크 등도 발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블록들이 실제로 등대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스완 화강암으로 된 문틀은 높이 11.5미터, 무게 70톤이 넘을 정도로 거대해서, 이런 블록이 다른 곳에서 옮겨졌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문틀이 바로 카이트베이 요새 기슭에서 발견되었고, 고대 사료들이 등대가 요새 부지에 있었으며 지진으로 붕괴했다고 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틀이 등대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12세기 사료는 등대의 부재들이 용융 납으로 접합되어 있었다고 전하는데, 발굴 과정에서 실제로 납 핀이 박힌 블록이 발견되었고, 요새 주변 지역에서도 납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CEAlex 연구원 무라드 엘 아무리(Mourad El Amoury)는 건축 부재에 남은 접합 홈과 발굴된 납의 형태를 대조하는 연구를 통해, 등대 건설 당시 사용된 이 봉인 기술을 확증했습니다.
그럼에도 등대의 위치 자체에 이견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장 요요트(Jean Yoyotte)는 『스트라본의 이집트 기행』 해설에서 이 이론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카이트베이 요새 기슭에서 발견된 석재들의 배치가 붕괴 시 예상되는 순서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요트는 이 블록들이 적선으로부터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암초, 즉 인공 리프였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