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므와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히틀러 군대가 처음 겪은 뼈아픈 대학살

므와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히틀러 군대가 처음 겪은 뼈아픈 대학살

1939년 9월 1일부터 3일까지 벌어진 므와바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 '모들린군(Modlin Army)'은 독일 제3군의 부대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다만 '군(Army)'이라는 명칭은 실제 병력이 군단 규모에 불과했던 이 폴란드 부대를 설명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용어였다. 모들린군은 폴란드 최고사령부가 폴란드 국토 거의 전역에 걸쳐 일렬로 배치한 7개 군 가운데 하나였다.

방어선 재편

폴란드 지도부는 원래 모들린 지역에서 방어하기로 되어 있던 모들린군을 독일 국경에 가까운 므와바 지역의 전방 진지로 이동시켜 방어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쪽 나레프(Narew) 방어 체계와의 연결도 함께 유지해야 했다.

폴란드군 지휘관 에밀 크루코비치프셰드르지미르스키(Emil Krukowicz-Przedrzymirski) 준장은 제20보병사단을 새 진지에 배치해 므와바 북쪽에 요새화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고, 이 요청은 1939년 7월 3일부로 승인되었다.

참호선, 콘크리트 진지, 대전차 도하는 므와바 강 유역, 즉 같은 이름의 도시 북쪽을 따라 구축될 예정이었다. 진지 중앙에는 니에미예 늪지대가 있어 기계화 부대의 통행이 불가능했고, 이 늪지는 방어선을 동서 두 구역으로 가른 장벽이 되었다. 서쪽 구역은 콘크리트 진지 68개로, 동쪽 구역은 25개로 보강하기로 했다.

방어선 서부 구간의 공사는 7월 14일 시작되어 사단 공병대대의 감독 아래 제20보병사단 병력들이 시공했고, 동부 구간의 공사는 8월 12일에 착수되었다. 자원봉사자들도 이 작업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침공을 개시한 9월 1일에도 방어선의 상당 부분은 완공되지 못한 상태였다.

독일군의 침공

9월 1일 정오, 페첼(Petzel) 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1군단 소속 부대들이 폴란드 제20보병사단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 제1군단은 켐프 기갑사단(제7기갑연대, 자동차화 연대 '그로스도이칠란트')과 제11·제61보병사단을 운용했다. 독일군은 병력, 전차, 근접 항공 지원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폴란드군은 눈부신 반격으로 수많은 독일 전차를 격파했다.

독일 제3군 사령관 폰 퀴클러(von Küchler) 대장은 분노하여 공격 재개를 거듭 명령했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같았다. 폴란드군은 훌륭하게 싸우며 공격해 오는 적들을 쓸어눌렀다.

독일군은 굴욕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 날 오후 그들은 돌아와 폴란드 우익 방면에 집중 포격을 퍼붓는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고, 폴란드 방어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폴란드 제79보병연대는 즉각 역습을 감행했지만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다.

이에 크루코비치프셰드르지미르스키는 지금까지 예비대로 보유해 온 제8보병사단을 우익 방면 지원에 투입했다. 또한 마조비아 기병여단은 동쪽으로 이동하며 폴란드군의 측면을 확장했다. 폴란드군 사령관은 제8보병사단에 역습을 명령했다.

제8보병사단은 과감히 공격에 나섰으나 강력한 독일군 부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활약하는 독일 항공기의 공습에 시달리며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산하 제13·제32보병연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질서 있게 므와바로 후퇴한 부대는 제21보병연대가 유일했다.

반면 폴란드 제20보병사단의 방어 구역에서 독일군은 다시 한번 처참하게 좌절했다. 독일군은 폴란드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삼는 비열한 전술을 동원해서야 동쪽의 폴란드 진지 일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굴의 제20보병사단은 다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결국 영웅적인 이 폴란드 사단은 서쪽에서 측면을 돌파당하고 말았다. 제79보병연대는 독일군 '워드리히(Wodrig)' 군단(제1·제12·제217보병사단)의 공격을 받은 뒤에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크루코비치프셰드르지미르스키는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3일간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특히 심각해 사망·부상·실종자가 5,800명을 넘겼고, 전차 72대를 추가로 잃었다. 폴란드군은 1,200명이 전사하고 1,500명이 부상당했다.

전투가 남긴 의미

므와바 진지에서 폴란드군이 보여준 영웅적인 저항 덕분에 독일군의 북부 방면 바르샤바 진격은 크게 지연되었다. 다만 후퇴 과정에서 폴란드군은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심한 시련을 겪었다. 만약 크루코비치프셰드르지미르스키가 보병 사단 두 개만 더 확보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다. 아마도 독일군의 북부 돌진은 완전히 저지되었거나, 최소한 훨씬 크게 지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포메라니아의 폴란드군도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부대는 서쪽에서는 독일 제4군에게, 동쪽에서는 독일 제3군에게 협공당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모들린군이 므와바 진지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독일 제3군은 적어도 그토록 수월하게 포메라니아의 폴란드군을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포메라니아군의 잔존 병력과 거의 온전한 포즈난군이 이후 부주라(Bzura) 강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맹렬히 맞서며 독일군의 작전 계획을 뒤흔들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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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와바 전투 당시 1호 전차(Pz I) 경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전진하는 독일 보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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