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배경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공세는 프랑스군의 붕괴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6월 22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며 패전을 공식화했다. 같은 해 7월 10일, 국민의회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제3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페탱은 행정권과 입법권을 모두 장악한 채 새로운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페탱은 곧바로 '국민혁명(Révolution nationale)'을 추진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그는 극우 단체 아쇽 프랑세즈의 이데올로기에서 영감을 얻어 보수적·전통주의적 가치로의 회귀를 내걸었다. 1940년 8월 13일에는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가 금지·해체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노동조합 역시 해산되었다.
1940년 10월 3일: 유대인 법령의 제정
주요 인물: 필리프 페탱, 피에르 라발, 아돌프 히틀러
비시 정권은 1940년 10월 3일부터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페탱의 주도로 작성된 '유대인 법령(Statut des Juifs)'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 차별 법령이었다. 1791년 이래 프랑스 법은 유대인 시민과 비유대인 시민을 어떤 방식으로도 구별하지 않았으나, 이 법령은 유대인 조부모 셋을 둔 사람, 또는 배우자가 유대인일 경우 동일 인종의 조부모 둘을 둔 사람까지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반유대주의는 이제 '인종'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법제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이 법령에 따라 유대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선거직에 출마하거나 임명될 수 없게 되었고, 공무직에서도 배제되었다. 예외적으로 전쟁 훈장을 보유한 경우에 한해 행정기관의 하급 직위를 맡는 것은 허용되었다.
영향과 결과
- 유대인 법령은 프랑스 자체의 반유대주의 정책의 서막이 되었다. 페탱은 1940년 10월 말부터 나치 독일과의 협력 노선도 병행했는데, 같은 해 10월 몽투아르에서 열린 페탱과 히틀러의 회담은 두 나라 사이의 특수한 관계, 이른바 '협력(collaboration)' 정책을 상징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41년 6월 2일에는 두 번째 유대인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금지 직종을 더욱 확장하여, 유대인이 은행업, 증권 중개업,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는 것까지 금지했다.
- 비시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결국 참혹한 결과로 치닫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2년 7월의 '벨드롬 드 이베르(Vélodrome d'Hiver) 대검거'이다. 프랑스 당국은 점령군의 지시 없이 자체적으로 프랑스 유대인 남녀와 어린이들을 체포하여 독일의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