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9년 비엔나 포위전: 오스만 제국의 한계선
1529년 비엔나 포위전(1683년 빈 전투와는 별개의 사건)은 오스만 제국이 도달한 가장 서쪽의 진격이었으며,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군대 간의 수많은 충돌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전투는 튀르크 군대의 발걸음을 마침내 막아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헝가리 일부를 정복하기는 했다.
오스만 제국의 상황
술레이만 1세 술탄은 제국의 대대적인 확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 1521년: 베오그라드 점령
- 1522년: 성 요한 기사단(예루살렘·로도스 기사단)이 지키던 로도스 섬 탈환
-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마자르 연합군 격파, 부다와 헝가리 대부분 점령
- 1527년: 베네치아로부터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점령
술레이만은 오스트리아를 강력한 적수로 여기고, 그 심장부인 수도를 향해 직접 공격을 감행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대공 페르디난트는 서유럽의 반응을 살피며 오스만의 진격을 주시하고 있었으나, 서유럽 모두가 그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프랑수아 1세는 적극적인 협조를 거부했다.
1529년 봄, 술레이만은 최소 10만 명의 병력과 500문의 대포로 구성된 대군을 소집했다. 여기에는 최소 2만 명의 예니체리와 새 주인을 위해 싸우는 헝가리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술레이만 자신이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고, '이브라힘'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그리스 출신 노예 출신 세라스케르가 부대 조율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해 봄에는 유례없는 폭우가 내려 도로가 진창이 되었고, 수백 마리의 낙타 행군이 어려워지면서 200문의 대포는 후방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튀르크군은 요새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칸 출신 광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방어 준비
오스만군이 저지른 만행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처음에는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곧 강렬한 항전 의지로 바뀌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형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원조를 거부하자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헤미아로 피신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실질적인 방어 지휘는 70세의 독일 용병 니콜라스 백작 폰 잘름(Niklas Graf von Salm)에게 맡겨졌다.
폰 잘름은 1,000명의 창병과 700명의 스페인 화승총병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는 23,000명의 수비군, 2,000명의 기병, 75문의 대포로 구성된 수비대를 총괄하며, 300년이 넘은 노후한 성벽을 서둘러 보강했다. 또한 성벽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해 방화식량고와 방벽을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식량 비축을 아끼기 위해 그는 여성, 아이, 노인 4,000명을 호위 부대와 함께 도시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하오스트리아 지역은 이미 오스만 정찰병들이 득실거렸고, 이 집단 대부분은 학살당했다. 생존자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포위전의 시작
튀르크군은 9월에 비엔나 성 앞에 도달했다. 병력 상당수가 병을 앓고 있었고, 건강한 병사 중 3분의 1은 경기병으로서 공성전에는 크게 쓸모가 없었다. 항복 권고를 위해 파견된 사절단은 폰 잘름에게 거절당했다.
다음 날 300문의 대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포수들은 화약이 젖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불화살 공격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에크 폰 라이샤흐(Eck von Reischach)가 이끄는 100여 명의 기병이 기습 돌격을 감행해 두 개 조의 포수들을 살해한 뒤 무사히 성벽 안으로 귀환했다. 포격은 계속되었으나 여전히 성과가 없었고, 총공격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더지 전쟁' — 지하 터널 공방전
10월 1일, 도시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한 기독교 광부가 중요한 정보를 전했다. 격렬한 포격의 진짜 목적은 도시를 향한 터널 굴착 소리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네 개의 성문 중 하나인 케른텐 문(Carinthian Gate)이 주요 표적으로 보였다.
터널전 전문가였던 폰 잘름은 즉각 기발한 대책을 강구했다. 성문 인근 지하실 근처에 물통과 마른 완두콩을 배치한 것이다. 물결이 일거나 완두콩이 흔들리면 경보가 울리고, 역광부들이 굴착에 나서 여섯 개의 터널을 발견해냈다. 일부 터널에는 이미 화약 통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터널에는 오스만 측 광부들이 아직 작업 중이었다. 좁은 지하에서는 총기를 쓸 수 없었기에 전투는 칼로 베는 백병전이었다. 생환자들은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상태로 돌아왔다. 어느 순간 화약 통이 폭발해 양측에서 수십 명씩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이 포위전은 '두더지들의 포위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뢰는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발견되었지만, 끊임없는 굴착 작업은 수비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10월 5일, 두 개의 지뢰가 소금 문(Salt Gate) 근처에서 폭발하여 한 개 중대가 통행할 만큼의 틈이 벌어졌다. 예니체리들이 몰려들었으나 창병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그다음 날 밤, 오스트리아군은 새로운 형태의 반격에 나섰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관통형 폭탄을 든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의 결사대원들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 오스만 진영에 몰래 접근해 텐트에 폭탄을 던진 뒤 도주했다. 이로써 2,000명의 튀르크 병사가 잠든 사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케른텐 문에서 또다시 폭발이 일어나자 예니체리들이 공격에 나섰으나, 아르케부스(화승총) 사수들과 양손검을 든 보헤미아 전사들에게 격퇴되었다.
최후의 공격과 철수
그러나 10월 11일이 되자 비는 계속되고 낙타들이 병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빈 쪽에서는 성벽 위, 심지어 '왕립' 건물 지붕 위에까지 대포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튀르크군의 대포보다 사정거리가 더 긴 것이었다. 포위군의 식량도 바닥나고 있었다. 술레이만은 군사회의를 열고 최후의 총공격을 결정했다.
10월 14일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라스케르 이브라힘이 직접 선두에 서서 바시보주크(Bashi-bouzouk, 비정규 민병대)를 이끌고 케른텐 문과 '베르크(Berg)'라 불리는 성곽 요새를 향해 돌진했고, 그 뒤를 예니체리들이 따랐다. 평소에는 종교적 열정만으로 충분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전리품이 약속되었다. 술레이만은 손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차례 공격을 명령했다. 폰 잘름도 직접 전선에 나섰다가 즉시 중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 새로운 좌절 이후, 술레이만 술탄은 총사령관 이브라힘 파샤와 상의했다. 군사회의 끝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의 철수를 명령했다. 술탄은 병사들이 지쳤고 사기가 바닥에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른 겨울의 도래를 우려했을 수도 있다. 또한 라인 궁정백 프리드리히가 지휘하는 구원군이 빈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구원군은 전장에서 튀르크군에 맞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날 밤, 튀르크군은 전초기지 철수를 시작했다. 그들의 후퇴는 만행으로 점철되었다. 그들은 많은 포로들을 살해했다(증언에 따르면 희생자가 2,000명을 넘었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만 남겨 노예 생활을 강요했고, 늙고 가난한 이들은 학살했으며, 그들의 절규는 성벽 위로 울려 퍼졌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튀르크군 철수 소문이 확실해지면서 도시는 환희에 넘쳤다. 성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에서 장엄한 미사가 거행되었고, 도시의 교회 종들이 힘차게 울려 퍼졌다. 비엔나는 구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