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쿠르스크 전투: 독일 기갑 전력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다

증원 부대와 소련군의 반격

증원 부대가 전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SS 라이프슈탄다르트 연대는 베르호펜예에서 저항 없이 활짝 열린 평야를 가로질러 진격했다. 독일 외무장관의 아들인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가 이 연대를 지휘했는데, 그는 훗날 마을 북쪽 숲까지 약 800미터 지점에 도달했을 때 소련군의 강력한 역습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했다.

"각종 크기의 소련 전차들이 숲에서 쏟아져 나와 일렬로 벌어지며 우리를 차단하려 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밀밭 때문에 시야는 좋지 않았지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공군이 지원에 나서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대형 자주포 두 문을 격파했다."

한 독일 조종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첫 번째 공격에서 내 기관포의 맹타격 아래 네 대의 전차가 폭발했다. 저녁까지 네 차례를 더 출격한 뒤에는 내 전과가 열두 대로 늘어났다. 불운은 사라졌다. 슈투카와 함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히 투입될 수 있고, 소련 전차의 막대한 물량마저 성공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에이스를 갖추게 되었다."

끝나지 않는 소련군의 보급

그러나 그 무엇도 소련군의 압도적인 물량을 진정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전장의 어느 구간에서든 파괴되거나 소모된 전력은 마법처럼 빠른 속도로 보충되었다. 보급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7월 12일 상황 브리핑에서 만슈타인이 히틀러에게 보고했듯이 그것들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듯했다."

당시 최전선의 보급선은 아직 기능하고 있었지만, 독일 본토에서 오는 지속적인 보급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만슈타인과 클루게가 쿠르스크 돌출부를 포위 섬멸하기 위해 내걸었던 거대한 병력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정비창고에서는 쉴 새 없이 분주함이 이어졌다. 전장에서 견인해 온 판터와 티거를 다시 전투 가능 상태로 되살리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탄약과 수송 열차는 극도로 부족했고, 지상에 움직임을 잃은 전차 하나하나가 처절한 현실을 상징했다.

이제 독일이 이 전투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기갑 전력을 걸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쿠르스크에서 아직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의 전황은 공세의 종결과 서부 전선으로의 병력 이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로 7월 12일,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제4기갑군의 죽음의 질주'

쿠르스크 전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7월 12일부터 14일 사이에 펼쳐졌다. 아홉 날 동안 양측은 헤비급 권투 선수처럼 서로에게 거대한 일격을 퍼붓으면서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한 채 버텨왔다. 7월 12일 새벽, 호트는 군단장들을 소집해 소련군이 크룰릭과 노보셀롭카 사이의 방어선을 강화하고 병력을 집결하기 전에 돌파구를 여는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남부집단군의 요새화된 방어선 남단, 곧 타간로그와 스탈리노 사이 도네츠강과 미우스강을 따라 이어진 방어선이 적의 공격 위협에 놓였다는 정보 보고를 받았다. "곧 우리가 그곳에 필요해질 것이다"라는 것이 그가 SS 군단장 하우서에게 남긴 말이었다.

용감한 자의 말이었다. 그는 이제 가동 가능한 전차 600대를 손에 쥐고 있었고, 이 부대가 공세의 첨병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4군의 병사들은 모두 지쳐 있었고 탄약도 극히 부족했다. 반면 바투틴은 신형 85mm SU-85 자주포를 비롯한 새 장비와 신선한 병력을 보충받았다. 게다가 그는 제5전차군 전체를 예비대로 확보하고 즉시 투입할 준비를 마쳤다.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독일군의 이 마지막 시도는 훗날 '제4기갑군의 죽음의 질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먼지 속의 결전

"산책하기 좋은 날씨군"이라고 제프 디트리히는 자신의 지휘 전차 운전병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비는 오지 않을 거야."

실제로 비는 오지 않았다. 그날은 건조한 혹서가 전장을 덮친 날이었다. 환기와 통풍 장치에도 불구하고 전차 내부는 화덕 같은 열기가 가득했다. 모래길 위를 질주하는 중장비들은 먼지 구름을 일으켰고, 이는 공군이 목표물을 식별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디트리히에 따르면 한때 T-34와 판터가 먼지 속을 달리다 정면으로 충돌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