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질 농민동맹과 농업개혁 운동: 토지를 원한 농민들의 투쟁

프란시스쿠 줄리앙(Francisco Julião)이 이끈 농민동맹(Ligas Camponesas)은 1950~1960년대 브라질 농촌 노동자를 대표하는 최대 조직으로, 농업개혁 실현을 위해 싸운 사회운동이었다.

기층 개혁을 지지한 농민 운동의 핵심

조앙 굴라르트(João Goulart) 정부가 추진한 기층 개혁(Reformas de Base)을 지지했던 주요 사회·정치 운동 중 하나가 바로 농민동맹이었다. 대지주에게 소작료를 내며 살아가는 토지 없는 노동자 가족과 영세 농민들의 지지를 결집한 농민동맹은 1950~1960년대 브라질 농업개혁 운동을 이끈 주역이었다.

브라질 농민동맹과 농업개혁 운동: 토지를 원한 농민들의 투쟁
농민동맹의 목표는 농업개혁을 통해 브라질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아 제당소에서 시작된 조직

농민동맹의 뿌리는 페르남부쿠(Pernambuco) 주에서 결성된 '페르남부쿠 농축산협회(SAPP)'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직의 첫 활동은 더 이상 설탕 생산이 어려워진 갈릴레아 제당소(Engenho Galileia) 토지에서 생활하던 140호 소작인 가족들을 조직한 것이었다. 당시의 목표는 복지적 차원에서 제당소 가족들의 생산 기술 향상을 지원하는 데 있었다.

프란시스쿠 줄리앙과 첫 번째 승리

그러나 제당소 안에서 형성된 이 조직화된 세력은 곧 소유주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소유주는 소작인들의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해 토지 임대료를 인상했고, 이는 결국 가족들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맞서 소작인들은 수도 헤시피(Recife)의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제당소를 소유한 대지주와의 법정 싸움이 시작되었다. 프란시스쿠 줄리앙(1915~1999)은 이 도전을 받아들여 운동의 대변인이 되었다.

첫 성과는 1959년에 나왔다. 법원이 제당소 토지를 징수해 소작인 가족들에게 분배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소작인들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다.

운동의 확산과 정치적 진출

이 승리를 계기로 농민동맹의 활동은 한층 강화되었다. 농업개혁을 요구하는 농민 동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여러 주에 동맹 위원회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제도권 정치에서도 성과를 거두어 프란시스쿠 줄리앙은 페르남부쿠 주 주의원으로 두 차례, 연방 하원의원으로 한 차례 선출되었다. 운동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한 줄리앙은 자니오 쿠아드로스(Jânio Quadros)와 함께 쿠바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토지 투쟁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급진적 성격과 미국의 경계

농민동맹은 브라질에서 근본적인 농업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지주들의 탄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치에 무장 저항으로 맞서기도 했다. 이러한 급진적 성격은 미국의 우려를 낳았고, 미국 언론은 농민동맹을 브라질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쇠퇴와 1964년 군사 쿠데타

1960년대에 들어 정부가 노동법 통합규정(CLT)에 담긴 노동권을 농촌 노동자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농촌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농민동맹은 농촌 노동자 조직 안에서 다른 단체들과 영향력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1964년 군사 쿠데타는 브라질 토지개혁 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해 프란시스쿠 줄리앙은 연방 하원의원 직을 박탈당했고 체포되기도 했다. 1965년에는 멕시코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동맹의 유산, MST로 이어지다

농민동맹이 와해되었지만, 1964년 수립된 군사정권 역시 브라질 농촌 노동자들의 토지 분배에 대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대토지 소유의 착취에 기반한 농업 생산 구조는 수많은 노동자를 생산수단에서 배제했고, 이는 브라질의 극심한 사회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농업개혁을 다시 외치던 농촌 노동자들은 새로운 토지 점거 투쟁을 벌였고, 이 흐름은 1983년 토지없는농민운동(MST)의 탄생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