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퐁트누아 전투(1745년 5월 11일): 프랑스 vs 연합군, 결전의 배경

퐁트누아 전투(1745년 5월 11일): 프랑스 vs 연합군, 결전의 배경

퐁트누아, 단순한 승리 그 이상의 의미

1745년 5월 11일, 현재 벨기에 에노(Hainaut) 주 일대에서 잉글랜드·하노버·네덜란드(그리고 소수의 오스트리아군)로 구성된 연합군과 루이 15세의 프랑스군이 격돌하여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퐁트누아(Fontenoy) 전투다.

전통적으로 이 전투는 작센(Saxe) 원수의 위대한 군사적 성공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의 공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으나, 전장에 직접 자리한 프랑스 국왕의 역할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는 점은 함께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퐁트누아는 유럽 정세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의 수많은 삽화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 아니었다.

전쟁의 도화선: 카를 6세의 죽음

신성로마황제 카를 6세가 서거하자 여러 유럽 제후들은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계승할 절대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무시하고 왕위 상속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범위한 국제 분쟁이 촉발되었고, 동맹의 결성과 해체, 전투와 조약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프랑스는 오랜 숙적인 잉글랜드가 주도하는 거대 연합군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1745년 초, 결전을 앞둔 두 군대

1745년이 시작되면서 교전국들은 다가오는 회전이 판세를 좌우할 결정적 국면이 될 것임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군 2만 명이 네덜란드군의 지원을 받아 이미 대륙에 상륙해 있었다.

이에 맞서는 프랑스군은 약 7만 명 규모로, 작센 원수가 강력하게 이끌고 있었다.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와 안나 쾨니히스마르크(Anne de Koenigsmarck)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인 그는 50대에 접어든 장군으로, 기발한 장난기로도 유명했지만 동시에 극심한 수종(浮腫) 발작에 시달려 말에 올라앉기조차 힘든 처지였다. 그래서 퐁트누아 전투에서 우리는 그가 말이 아니라 부관들이 재빨리 옮겨 주는 버들가지 가마에 앉아 전장의 모든 '격전지'를 돌며 지휘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작센 원수의 명확한 계획

탁월한 전략가였던 작센 원수에게 상황은 분명했다. 전투 지점이 정해진 이상 먼저 투르네(Tournai)로 진격하여 도시를 함락하고, 이어 스헬더 강(Scheldt)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이번 전쟁의 영토적 쟁점인 오스트리아령 플란데른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컴벌랜드 공작의 경솔한 선언

4월 30일부터 연합군은 투르네가 담당하는 핵심 전략적 역할을 의식하고 이 도시를 향해 진군했다. 이 중요한 거점을 손에 넣으면 프랑스군을 손쉽게 압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연합군 총사령관 컴벌랜드(Cumberland) 공작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무척 경솔하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파리로 갈 것이거나, 아니면 내 부츠를 먹어 치울 것이다!"

작센 원수의 즉각적인 대응

적의 기동을 파악한 작센 원수는 즉시 연합군의 진격로를 차단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으로는 투르네 앞에 약 2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도시를 고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헬더 강에서 멀지 않은 마을 앙투앵(Antoing) 앞에 4만 7천 명을 진지시킨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다가올 회전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지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