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사랑받는 자인가, 바보인가 — 샤를 6세의 격동의 인생

12세의 소년왕, 샤를 6세의 즉위

1368년 파리에서 태어나 1422년에 생을 마감한 샤를 6세는 1380년,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좌에 올랐다. 샤를 5세와 부르봉 가문의 잔(Jeanne de Bourbon)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왕실 성년 연령을 14세로 규정한 칙령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1388년까지 숙부들인 앙주 공작, 베리 공작, 부르고뉴 공작, 부르봉 공작의 후견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들 왕자들은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너무나 다르고 때로는 정반대였기에 일관된 정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체로 그들은 권력을 잡는 동안 자신들의 영지를 넓히는 데 몰두했으며, 부르봉 공작만이 어느 정도 절제를 보였지만 샤를 5세가 정치에 참여할 몫을 주라고 당부했음에도 넷 중 가장 영향력이 미약했다.

'백합의 왕자들'의 실정과 백성의 분노

숙부들의 통치는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선왕이 한평생 모아둔 재정 비축분을 말라붙게 만들었다. 결국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는 곳곳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파리에서는 1382년 '마요탱(Maillotins)의 반란'이라 불리는 봉기가 촉발되었다.

같은 해 플랑드르 백작의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반란을 일으킨 플랑드르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왕을 군사 원정에 이끌었고, 로즈베크(Roosebeke) 전투(1382년 11월 27일)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왕국에 가져다준 실익은 거의 없었다. 루앙, 트루아, 랭스, 파리 등지의 소요 진압은 사회적 불만의 표출을 짓눌렀을 뿐 그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못했다. 또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준비된 잉글랜드 원정은 지휘관의 부재 탓인지 아무런 결과도 남기지 못했다. 한편 부르고뉴 공작의 독일 방침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왕은 1385년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의 딸 이자보(Isabeau de Bavière)와 혼인했다.

친정 시대: 마르무제(Marmousets)의 개혁

1388년, 숙부들의 통제에 염증을 느낀 국왕은 스스로 성년을 선언하며 친정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의 참모들이었던 '마르무제(Marmousets)'들을 기용했다. 부레(Bureau), 비엔 제독, 클리송(Clisson), 주브날 데 위르생(Juvénal des Ursins)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손을 빌려 행정이 정상화되면서 전임 샤를 5세 시절의 호경기를 되찾은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외교적으로도 성과가 있었다. 샤를 6세의 딸 이자벨이 잉글랜드의 어린 국왕 리처드 2세와 약혼하면서 양국의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무능한 베리 공작에게서 랑그독 통치권을 회수하여 가스통 페뷔스(Gaston Phébus)에게 맡겼다.

운명은 젊은 왕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san)은 그를 '몸과 삶 모두에서 더없이 빼어난' 군주라고 찬양했고, 백성들은 그의 정의로움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리한 관찰자만은 왕의 정신에 흔들림이 오는 순간들을 간파했다. 다만 이는 궁정이 탐닉하는 향락과 연회 탓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르망 숲의 비극: 발작과 광기

1392년 8월, 유명한 사건이 벌어졌다. 두 차례의 연속된 충격을 겪은 국왕은 르망 숲에서 급작스러운 광란의 발작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동생 루이 도를레앙을 죽일 뻔하기까지 했다. 이 순간부터 샤를 6세는 온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망상과 명료함이 번갈아 나타나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기의 시기는 길어졌고, 온화한 시기는 무기력으로 변해갔다. 1393년 열린 유명한 '광인의 무도회(Bal des Ardents)'가 병을 악화시켰다는 설도 있다. 이 무도회에서는 왕의 의상에 불이 붙어 여러 귀족이 불타 죽는 참극이 벌어진 바 있다.

왕권의 공백, 봉건 세력의 각축

국왕이 생 폴 저택(Hôtel Saint-Pol)의 담장 안에 유폐된 채 슬픈 나날을 보내는 동안, 프랑스는 다시 봉건 파벌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이번에는 도를레앙 가문(국왕의 동생 루이 1세, 이후 그의 아들 샤를)과 부르고뉴 가문(필리프 대담공, 이후 용맹공 장)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필리프 대담공(Philippe le Hardi)이 부르고뉴 가문을 대표하던 시기에는 경쟁이 상대적으로 평온했지만, 1404년 장 무서움 없는 자(Jean sans Peur)가 뒤를 이으면서 갈등은 격화되었고, 1407년 부르고뉴파 자객들에 의한 루이 도를레앙 암살 사건 이후 무력 충돌로 번졌다. 즉위 이래 장은 여러 차례 국왕의 신병을 장악하려 시도해 왔는데, 이제야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1408년부터 1410년까지 그는 왕실 평의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명료한 시기의 샤를 6세는 언제나 동생 루이 혹은 조카 샤를에게 우호적이었다. 부르고뉴 공작은 왕의 합리적인 뜻을 광기의 발작으로 포장했고, 발작 중에는 왕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서명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을 달래기 위해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동료, 다정한 오디네트 드 샹디베르(Odinette de Champdivers)를 곁에 붙여 주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내전

이렇게 하여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아르마냐크파는 샤를 도를레앙의 장인이자 군사 지휘관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지휘 아래 도를레앙파를 지원했다. 파리는 여러 파벌의 연이은 지배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소요에 내맡겨졌다.

부르고뉴파의 지배 기간 동안 파리 대학교는 정육상 조합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합리적인 내용의 '카보슈 칙령(Cabochian Ordinance, 1413년 5월)'이 나오게 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아르마냐크파'가 된 파리 시민들이 같은 해 8월 부르고뉴파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아쟁쿠르의 참패와 트루아 조약

잉글랜드의 새 왕,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무정부 상태를 기회로 삼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는 노르망디를 체계적으로 정복한 뒤 1415년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단을 산산조각 냈다. 한편 왕비 이자보는 부르고뉴파로 기울었고, 잠시 아르마냐크파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나 탈출하여 파리에서 스스로 섭정을 자칭했다.

이윽고 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와 은밀히 동맹을 맺은 장 무서움 없는 자는 1418년 수도를 장악했고, 샤를 6세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그러다 1419년, 영국과의 동맹 관계 철회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몽트로 다리에서 왕태자 샤를과 회담하던 중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필리프 선량공(Philippe le Bon)은 헨리 5세와 공식적인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왕비 이자보의 공모 아래, 1420년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을 통해 왕국에 남은 것을 영국 쪽에 그대로 넘겨 버렸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또 다른 딸 카트린과 결혼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선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본래 샤를 6세가 내려야 하는 것이었고, '사랑받는 왕'은 여전히 백성들의 애착을 받고 있었기에, 그는 왕이라는 칭호를 관대하게나마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42년 통치의 종언

샤를 6세는 헨리 5세가 죽은 지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 프랑스 역사상 가장 긴 통치 중 하나인 그의 재위는 무려 42년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