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당초에는 잉글랜드)의 13개 식민지는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대서양 연안을 따라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에 형성되었습니다. 각 식민지는 지리적 조건, 인구 구성, 경제 구조, 정치 제도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또한 식민지 간 교통은 느리고 어려운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도로 사정이 열악했고 다리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구
1770년경 13개 식민지의 총인구는 약 22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식민지들은 건립 이후 이민 유입과 높은 출생률 덕분에 꾸준히 빠른 인구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인구 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고, 정착민 대부분은 농촌에서 생활했습니다. 인구는 주요 도시가 자리한 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중 필라델피아가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1780년 약 45,000명). 필라델피아는 보스턴이나 뉴욕을 앞서는 최대 도시였습니다.
사회
미국 식민지 사회는 매우 다원적이었습니다. 영국계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북부와 중부 식민지를 중심으로 독일인, 스위스인, 네덜란드인,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스칸디나비아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았습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이러한 민족적 혼합이 영국 본토와의 분리를 촉진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종교 생활 역시 다양했습니다. 지배층은 대체로 개신교 신자였으나 여러 교파로 나뉘어 있었고, 의심의 눈총을 받던 유대교도와 가톨릭 신자들이 주요 종교 소수집단을 이루었습니다.
미국 독립혁명 직전, 유럽계 정착민들은 서로 다른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습니다. 13개 식민지에는 영국과 같은 영주제·봉건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토지 소유와 재산을 기반으로 한 또 다른 위계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최상위 엘리트는 총독, 대농장주, 대상인, 선주 등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장인, 국왕 대표, 농부, 소상인 등 중간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했습니다.
사다리 최하단에는 선원, 소작인, 하인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s)'이라 불린 이들은 백인 하층 노동자 집단으로, 그 처우는 노예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은 죄수, 여성, 아동을 포함해 자발적이든 강제든 신대륙으로 보내져 농업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 격차는 점점 벌어졌습니다. 각 집단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는 도시와 농촌에서 긴장, 나아가 반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계몽된 엘리트들은 사회 질서 유지와 재산 보호에 관심을 두었고, 다른 정착민들은 영국의 세금 정책과 토지 불평등에 더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일부 설교자들의 활동은 이러한 사회적 긴장을 부채질했으며, 술집과 여관 같은 도시의 사교 공간은 정보 교환과 토론, 만남의 장소로서 여론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언론 역시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수도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1750년부터 1780년 사이 그 수는 236,000명에서 575,000명으로 급증했습니다. 대부분의 흑인은 남부 식민지에 집중되어 노예 신분으로 살았지만, 일부 해방된 흑인들은 도시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790년 미국 영토 범위 내에 거주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는 약 10만~2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당시 유럽 여행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미국에 가난은 존재했지만 당시 유럽에서 흔하던 극심한 빈궁은 사실상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녀는 이 점이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 왜 그렇게 달랐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보았습니다.
정치·통치 구조
각 식민지는 자신의 역사에 따라 고유한 정치적 지위를 가졌으며, 통상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특허 식민지(chartered colonies)는 국왕이 민간 회사에 부여한 헌장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둘째, 소유주 식민지(proprietary colonies)는 개인인 영주 소유주(Lord Proprietor)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주민들이 총독을 선출했습니다. 셋째, 왕령 식민지(crown colonies)는 왕권이 마련한 헌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총독은 국왕의 이름으로 행정권을 행사하고 무력을 장악했으며, 세관 관리나 왕실 세무 감사관들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총독 평의회(Governor's Council)는 사법·행정·입법 권한을 함께 지녔으며, 상원에 해당하는 자문 기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울러 각 식민지에는 의회가 있어 지역 문제는 물론 예산과 민병대 장비 문제를 평의회의 동의를 받아 논의·결정했습니다. 의회는 런던에 대표단을 파견해 청원과 요구를 제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매사추세츠의 타운 미팅(town meeting)은 주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를 실현할 수 있게 한 제도였습니다. 식민지 영토의 광대함과 본국과의 먼 거리는 미국인들에게 상대적인 지역 자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경제
13개 식민지는 전체적으로 번영한 경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북부의 뉴잉글랜드는 수공업, 해상 무역, 어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상인들은 서인도제도와 활발히 거래하며 목재, 밀가루, 어류, 고래 기름을 수출하고 설탕, 당밀, 타피아(저급 럼주)를 수입했습니다. 이러한 무역은 금속공업과 방직 산업을 진흥시켰고, 조선소와 증류소의 발전도 촉진했습니다.
중부 식민지에서는 다각화된 농업이 발달하고 축산업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습윤 아열대 기후의 영향을 받던 남부 식민지는 주로 활력 있는 상업 농업에 의존했으며, 담배·인디고·곡물을 주로 수출했습니다. 대농장주들은 노예 노동력을 동원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고, 백인 귀족층은 이러한 장원에서 살며 웅장한 저택을 짓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플랜테이션 제도는 남북전쟁 때까지 이어진 그것과는 아직 달랐습니다. 후자는 1798년 노예 반란을 피해 도피해 온 프랑스인 농장주들에 의해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남부는 대체로 농촌 중심이었고, 찰스턴, 볼티모어, 노퍠크 같은 도시는 드물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