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콜(Raskol): 러시아 정교회를 두 동강 낸 17세기 대분열
불편하게 다가온 형식주의
러시아 교회는 모스크바 공국과 함께 성장해 왔지만, 그 경직된 종교적 형식주의는 점차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16세기에 루터와 칼뱅이 주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교회가 국가 안에서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었고, 모스크바 국가와 같은 시기에 탄생했음에도 변화의 흐름에는 뒤처져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첫 총대주교가 설치된 것은 1589년으로, 초대 총대주교는 요브(Job)였습니다. 1652년 이 자리에 오른 니콘(Nikon)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에 필적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슬라브어 성전(聖典) 텍스트에 남아 있던 오류를 바로잡고, 종교 의례에서 사용되는 몸동작과 제스처까지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1654년부터 1656년 사이 열린 종교 회의들은 이러한 수정안들을 승인했지만, 이 개혁이 모든 이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바쿰 대 니콘
니콘 총대주교가 제안한 개혁 자체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수준의 변경이었음에도, 대사제 아바쿰(Avvakum)은 어떠한 변화도 단호히 거부하며 맞섰습니다. 다른 사제들과 평신도들 역시 같은 입장을 취했고, 교회 당국의 권위를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바로 이 갈등이 라스콜(Raskol), 즉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1658년 니콘은 교회가 국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차르와 결별합니다. 니콘이 강행한 급진적인 변화는 보수 진영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아바쿰은 나아가 니콘을 이단이라고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은 개혁에 저항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회의에서 승인된 개혁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에 맞설 것인가. 결국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구교도(舊敎徒), 올드 빌리버스
교회에 도전하기를 택한 이들, 예컨대 새로운 종교 의식의 몸동작이나 '예수'라는 이름의 새로운 철자법을 거부한 사람들은 '구교도(Old Believers)', 즉 구신앙파로 불렸습니다. 상인이든 농민이든 코사크든, 카라진(Karazine)과 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구교도들은 니콘을 적그리스도의 화신으로 여기는 별도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공식 교회의 성사(聖事)를 계속 받고자 하여 교회 당국과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곧 시작되었습니다. 서구의 종교개혁에서 개혁파가 박해받았던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보수파가 개혁파의 박해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화형당했으며, 아바쿰 역시 1682년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학살은 집단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저항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저항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항쟁은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보야리나(귀족 부인) 모로조바(Morozova)는 구교도 운동의 지지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정교회를 약화시킨 분열
교회는 가장 충성스러운 신자들을 배교자로 파문하는 것을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머리가 좋고 사업 수완이 뛰어난 인재들이야말로 구교도들 속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국가로부터 독립된 삶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상당히 약체화된 교회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라스콜을 둘러싼 한 가지 질문은 오늘날까지 역사학자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과연 니콘의 개혁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교회를 근대화하려던 시도였을까요?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분열이 훗날 왕좌에 오른 표트르 대제가 교회를 공격하는 반종교 정책을 펼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