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밀라 강 유역을 둘러싼 이 전쟁은 아마존 지류인 자루밀라(Zarumilla) 강 일대 정글 지대의 소유권을 놓고 페루와 에콰도르가 111년간 벌여온 분쟁의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었다.
극명한 군사력 격차
페루는 1930년대에 들어 군 전력 재편에 착수했다. 체코슬로바키아제 LTP-38 경전차 24대를 도입했고, 이탈리아제 카프로니 Ca.135·Ca.310 폭격기와 Ca.101 수송기, 미국제 더글러스 8A-3P 근접지원기, 복엽 전투기 카프로니 Ca.114, 단엽 전투기 노스 아메리칸 NA-50 등을 확보했다. 육군 규모는 약 2만 5천 명에 달했으며, 포병은 75mm와 105mm 야포를 운용했다. 군의 훈련 수준 역시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반면 에콰도르군의 상황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병력은 불과 7,500명에 불과했고, 보유한 것이라곤 이탈리아제 정찰기 몇 대와 65mm 경포가 전부였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에콰도르는 군부 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화려한 언변에도 불구하고 전쟁에는 완전히 무준비 상태였던 것이다.
전쟁의 발발
분쟁 지역의 경계 획정 시도는 19세기부터 여러 차례 있었다. 1936년에는 양국이 기존 국경을 상호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938년부터 해당 지역에서 충돌이 빚어졌다. 첫 발을 쏜 쪽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 답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1941년 7월 5일, 페루군이 에콰도르가 실효 지배하던 지역을 침공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북부' 파견군은 엘로이 우레타(Eloy Ureta) 장군의 지휘 아래 제1·제8경보병사단, 기병연대 2개, 전차 12대로 구성된 중대, 150mm 포 8문을 보유한 포병중대를 갖추었고, 이후에는 공수부대까지 증원받았다. 맞서는 에콰도르측은 3개 대대, 그중 하나는 경찰 부대에 불과했다.
페루 측 주장에 따르면, 자루밀라 강변의 에콰도르 도시 우아킬야스(Huaquillas) 경비대가 먼저 국경을 넘어 페루 순찰대를 공격했고, 이어 무장한 에콰도르인 200명이 페루의 아과스베르데스(Aguas Verdes)를 습격했다고 한다. 페루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침입자를 격퇴했고, 다음 날 항공 엄호 아래 적영토로 진격했다.
반면 에콰도르 측은 자국 영토에서 페루 순찰대와 민간인이 먼저 목격되었다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옳든 페루군은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엘오로(El Oro) 주를 침공했으며, 공군은 우아킬야스, 아레니야스, 산타로사, 마찰라(Machala) 등 도시들을 폭격했다.
동시에 페루는 선구적으로 낙하산 부대를 투입해 중요한 항만 도시 푸에르토볼리바르(Puerto Bolívar)를 공중에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된 사례였다.
정전과 평화 협정
그동안 에콰도르군도 증강되었다. 그러나 독재자 카를로스 아로요 델 리오(Carlos Arroyo del Río) 장군은 쿠데타를 두려워한 나머지 1만 2천 명의 병력을 수도에 묶어두고 침공을 외면했다. 마찰라가 함락되자 에콰도르 독재자는 휴전을 요청했다. 결국 7월 31일 작전이 중단되었을 때, 페루는 이미 1만 3천 명을 전장에 투입해 에콰도르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상태였다.
미국의 중재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은 페루에 약 8만 평방마일(약 20만 7천㎢)의 영토를 안겨주었다. 이후 페루군은 철수했고, 에콰도르는 굴욕적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쟁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양국이 최종 평화 조약에 서명한 것은 무려 1998년 10월이 되어서였다!
사상자 현황
양측의 전투 사상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에콰도르는 148명이 전사하고 235명이 부상당한 반면, 페루는 각각 84명과 72명이었다. 그러나 험난한 정글 환경과 각종 질병으로 인한 손실은 이를 압도적으로 웃돌았다. 질병과 궁핍으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 또한 적지 않았다.

페루의 더글러스 8A-3P 항공기

페루의 카프로니 Ca.114 항공기

페루의 노스 아메리칸 NA-50 전투기

LTP-38 전차 앞에 선 페루 장교들

페루 낙하산 부대 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