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799년 아부키르 전투: 나폴레옹,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

1799년 아부키르 전투: 나폴레옹,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다

아부키르 전투는 1799년 7월 25일, 이집트에서 프랑스 동방군과 오스만 제국군 사이에 벌어진 지상전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오스만 제국군을 완패시킨 승리였다. 승전 소식을 접한 클레베르 장군은 그날 저녁 보나파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장군님, 당신은 세상만큼이나 위대하지만, 세상은 당신에게 너무 좁습니다!”

전투 전 국면과 판도

영국의 압박을 받은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고, 두 개의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하나는 영국 함대가 수송하는 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시리아 북부에 집결하는 부대였다.

언제나처럼 주도권을 쥐기로 한 보나파르트는 1799년 2월 가자, 엘아리시, 야파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아크레(성 장 달크르) 공성전에서는 두 달간의 혈전 끝에 실패하고 만다. 도시는 총독 제자르 파샤와 파리 육군사관학교 동창생이자 뛰어난 포병인 앙투안 드 펠리포가 지키고 있었고, 영국 해군이 병력·식량·물자를 끊임없이 보급하는 데다 프랑스군은 흑사병으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인도로 내려가 현지 반영(反英) 봉기를 돕겠다는 동방 정복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면 군 전체를 이끌고 빈을 경유해 프랑스로 돌아가는 구상까지 갖고 있었다.

1799년 7월 14일, 60척의 영국 함대가 무스타파 파샤 휘하 1만 6천 명을 아부키르에 상륙시켰다. 이들은 항구 요새를 강습해 고다르 대대장 휘하 프랑스 수비병 300명을 무력화했고, 반도는 오스만의 손에 넘어갔다. 성채 위에는 터키 깃발이 휘날렸다.

이 성공에 고무된 무스타파 파샤는 카이로 진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탈출해 합류한 무라드 베이에게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가 감히 감당하지 못하던 그 무서운 프랑스 놈들, 내가 나서니 이렇게 도망치지 않느냐.” 무라드 베이는 답했다. “파샤여, 프랑스인들이 물러나 준 것을 예언자께 감사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몸을 돌린다면, 당신은 북풍 앞의 먼지처럼 사라질 테니까요.”

양측 전력

나폴레옹은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았다. 클레베르를 기다리지 않고 란스와 데제 사단, 무라트의 기병대를 이끌고 아부키르로 진격했다. 총 1만 명과 기병 1천 기였다. 한편 오스만군은 1만 8천 명을 동원했으나 실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8천 명에 불과했다.

전투 경과

25일, 오스만군은 방세로 전환해 해안과 진영 사이에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버텼다. 얕은 여울 때문에 함대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영국군은 함포 사격을 활용할 수 없었다. 보나파르트는 포병을 고지에 배치했지만 첫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데제 부대는 적진에 말려 들었고,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무라트는 과감한 돌격을 망설였다.

그런데 전황을 뒤바꾼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파샤가 부하들을 이끌고 요새를 떠나 전사한 프랑스 병사들의 목을 베기 시작한 것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은 명령도 기다리지 못한 채 적진으로 돌진했다. 무라트는 기병대로 측면 우회 기동을 펼친 뒤, 눈 깜짝할 새 적 전열을 관통해 도시 배후까지 돌파하며 무스타파 파샤의 퇴로를 끊었다. 이어 벌어진 일대일 대결에서 파샤가 발사한 총알은 무라트의 입을 관통해 투구를 찢고 척추뼈에 튕겨 나갔다가 늑골에 박혔고, 무라트는 파샤의 손가락 세 개를 잘라내며 외쳤다고 한다. “내 병사들에게 또 그런 짓을 하면,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더 중요한 것들을 잘라주마!” 무라트는 군의관 라레의 수술을 받았고, 다음 날에는 아무 탈 없이 지휘 업무에 복귀했다.

한편 나머지 오스만군은 배로 돌아가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몇 번의 밀물 때마다 해안은 터키인들의 터번으로 덮였다고 전해진다. 요새에 웅크린 3천 명의 오스만 병사도 며칠 뒤 갈증과 굶주림에 못 이겨 항복했다.

무라트는 그날 저녁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기적을 연출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두 차례 부상당한 베르트랑 대령은, 자신에게 단 25명만 데리고 ‘그 잡종 무리’를 돌격하라고 명령하는 보나파르트를 따라 손짓한 곳이 무려 천 명의 맘루크 기병 종대였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한다.

전과

프랑스군의 맹공은 값진 결실을 낳았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 220명, 부상 600명에 그친 반면, 오스만군의 손실은 처참했다. 전장에서 2천 명이 전사하고, 바다에 빠져 4천 명이 익사했으며, 요새에서도 1천 명이 죽고 1천 5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여파와 결과

클레베르는 저녁에야 도착했다. 영국 함대의 시드니 스미스 제독은 패배의 책임을 오스만 지휘부에 돌렸다. 그들은 로제타를 확보해 알렉산드리아를 고립시키라는 자신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 탈환이라는 목표에 병력을 온전히 투입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아부키르의 승리는 프랑스군에게 몇 달 숨통을 틔워 주었다. 데제는 계속해서 무라드 베이를 추격하며 상이집트로 진격했다. 무라드 베이는 1799년 8월 11~12일 모랑 여단장의 기동 부대에게 기습당하기도 했지만, 끝내 잡히지 않고 신출귀몰하게 활동했다.

8월 23일, 보나파르트는 지휘권을 클레베르에게 넘기고 베르티에, 무라트, 란스 등과 함께 호위함 뮈롱호에 올랐다. 영국 신문을 통해 통정부(統政府)의 잇따른 패전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중장기적으로 프랑스의 이집트 지배는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됐다. 클레베르는 1800년 3월 18일 헬리오폴리스 전투 승리로 프랑스의 지배를 회복했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카이로 자택 정원에서 신학생의 암살을 당했다. 후임 메누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부족해 카노프(알렉산드리아 교외)에서 패배한 뒤 9월 2일 항복했다. 영국군은 동방군의 생존자들을 프랑스로 송환해 주었다.

이집트에는 기적 같은 모험의 추억만 남았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프랑스 맘루크’가 된 이백~삼백 명의 낙오병과 탈영병들. 샤토브리앙은 이집트에서 용맹으로 이름난 가스코뉴·피카르디 출신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의 재능을 두고 베이와 파샤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