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말부터 1918년 11월까지 4년 이상 지속된, 당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초기의 흐름을 정리해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국제 정세
전쟁 직전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에서 다룬 바 있다. 핵심만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발칸반도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야망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슬라브 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이 땅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러시아가 발칸의 독립 운동을 부추기면서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또한 해외에서는 영국과 독일이 식민지 정책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영국은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으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종단 노선을 추구하는 3C 정책을, 독일은 베를린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발칸반도까지 철도를 연결하려는 3B 정책을 내세웠다. 이 3B 정책 때문에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 역시 크게 악화되었다.
이처럼 여러 문제가 얽힌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렸다. 각국은 경쟁국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나라들과 동맹·협력 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이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이다.
어쨌든 발칸반도는 열강들이 서로 충돌하는 대규모 전쟁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
사라예보 사건 (1914)
사실 발칸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이미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다.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이 많이 사는 나라로, 범슬라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쇠퇴해 가던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오스트리아에게 세르비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인
(출처: Wikipedia)
이런 갈등 속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보스니아 출신 세르비아인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발칸반도의 범슬라브주의를 타도할 명분을 얻었다. 세르비아 정부와의 관련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담긴 최후통첩을 보낸 뒤 한 달 뒤인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세계대전의 발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당시에는 "국지전으로 끝나면 다행"이라는 낙관론도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지키겠다는 의도도 있어 세르비아를 지원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개입에 대응해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함께 움직였고, 러시아와 군사 동맹(러불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도 참전하면서 전쟁의 규모는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독일의 계산 – 슐리펜 계획
열강이 모두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삼국동맹의 핵심인 독일은 삼국협상의 강대국인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육지로 포위되는 형국이었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어 공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독일은 먼저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했다. 이른바 서부전선의 전투다.
독일은 양면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 전력의 8분의 7을 서부 전투에 집중 투입해 단기간에 승부를 내고, 그 후 러시아를 공격한다는 소위 슐리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일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군대를 준비해 양면 작전에 나섰고,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게 진행되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영국의 참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벨기에였다.
독일은 벨기에에 군대 통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벨기에 동부 국경을 돌파해 침공했다. 작은 나라였던 벨기에는 장비와 규모 면에서 열세였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독일의 일정을 이틀 늦추는 데 그쳤으며 국토 대부분이 점령되었다. 다만 독일은 일부 병력을 벨기에에 묶어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또한 벨기에의 철도 파괴로 보급이 지연되면서 독일의 진격은 계획보다 더 늦어졌고, 이는 프랑스 침공의 지연으로 이어졌다.
사실 벨기에는 19세기에 네덜란드 연합왕국에서 갓 독립한 나라였다. 유럽 열강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독립 혁명을 종결시키며 런던 조약(1839)을 체결해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바 있었다.
영국은 바로 이 런던 조약을 근거로 참전을 결정했다.
당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소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 "독일의 폭정으로부터 세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선언했지만, 그 이면에는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아프리카 각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독일 식민지 공략에 참여했다.
세르비아 전역
제1차 세계대전의 원래 시작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자연히 두 나라 사이에 전투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음에도 오스트리아는 고전했다. 세르비아는 8월 중순의 체르 전투와 11~12월의 콜루바라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20세기 전쟁사에서 기적이라 불릴 만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수행 방식은 수천 명의 학살, 마을 약탈과 방화 같은 일반 시민에 대한 공격으로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결국 세르비아는 분전했지만 겨울에 장티푸스라는 전염병이 번지면서 전력이 크게 소진되었다.
한편 세르비아의 예상 밖 선전은 이탈리아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맹국이면서도 오스트리아와 영토 문제(이탈리아의 미수복주의, 이레덴티즘)를 안고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좌절과 참호전으로의 전환
벨기에 침공 당시, 프랑스는 '난공불락'으로 불리던 리에주 요새가 독일의 신무기 앞에 허무하게 함락되는 것을 보고 독일에 대한 작전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독일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에 대응해 서부전선의 일부 병력을 동부로 보내야 했다. 게다가 슐리펜 계획을 입안한 육군 참모총장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계획을 이어받은 새 참모총장은 '북프랑스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원안을 걱정하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었다.
여기에 해군이 해외 팽창에 주력하며 영국 왕립해군과의 우위 경쟁에 뛰어들면서 국방 예산이 해군 쪽으로 돌아갔고, 육군을 충분히 강화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은 초반 돌파에 성공했지만 결국 후퇴했고, 마른강 기슭에서 방어를 강화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다. 이 마른 전투로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참호전으로 전환되었고, 독일의 단기 결전 바람은 좌절되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쟁 범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영국 등의 선전(프로파간다)에 의해 과장된 부분도 섞여 있어, 독일은 국제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동부전선
한편 동부전선은 러시아와의 충돌을 말한다.
개전 2주 후, 러시아는 동프로이센 침공을 개시했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한 독일에게는 험난한 국면이었다. 러시아의 공격을 방어하던 부대가 철수하면서 동프로이센의 일부가 러시아에 점령되었다.
점령을 피하고자 했던 독일은 동부전선에 병력을 증원했고, 8월 말 두 나라는 동프로이센의 타넨베르크 주변에서 충돌했다.
러시아는 독일의 2배 이상 되는 병력을 동원했지만, 무전 내용이 독일에 의해 가로채지면서 작전이 통제 불능에 빠졌다.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타넨베르크 전투는 독일의 대승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도 동갈리치아(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충돌했다. 여기서 러시아가 승리해 점령하자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러시아화를 강요했고, 유대인과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 정책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00년 기준 갈리치아의 민족 구성은 총 480만 명 중 우크라이나인 약 65%, 폴란드인 약 22%, 유대인 약 13%였다.
갈리치아는 1915년 6월 오스트리아가 탈환할 때까지 러시아의 점령 하에 놓였다.
'전쟁'의 상식을 뒤집은 이유는?
이렇게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전차, 항공기, 독가스, 잠수함 등 전례 없는 살상 무기가 잇달아 도입되었고, 피해는 이전의 어떤 전쟁보다 커졌다. 전쟁 전에 준비된 탄약을 모두 소진해 버리는 소모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무기 생산의 기반이 일반 국민이었기 때문에 공격 대상은 곧 일반 국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의 인명 피해는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