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프랑스 병사에서 스웨덴 국왕이 된 남자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프랑스 병사에서 스웨덴 국왕이 된 남자
폰테코르보의 왕자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Jean-Baptiste Jules Bernadotte)는 1763년 1월 26일 프랑스 베아른 지방 포(Pau)에서 태어나 1844년 3월 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인생은 실로 기묘한 운명의 연속이었다. 1790년 프랑스 군대의 하급 부사관에 불과했던 그는 불과 28년 뒤인 1818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스웨덴에서는 카를 14세 요한(Karl XIV Johan), 노르웨이에서는 카를 3세 요한(Carl III Johan))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집정정부 시절과 제1제국 시대에 걸쳐 대사, 장관, 장군, 그리고 제국 원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군인으로서의 시작

베르나도트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그는 1780년 자신의 의지로 군 경력을 선택했다. 같은 해 브라삭 연대에 일개 사병으로 입대한 그는 1789년까지도 상등사(sergent-major)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스 혁명과 군경력의 비약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의 계급은 하사였다. 라인 방면군과 상브르에뮤즈 방면군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1794년 장 밥티스트 클레베르(Jean-Baptiste Kléber)에 의해 전장에서 여단장(brigadier general)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몇 달 후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으며, 플뢰뤼스와 윌리히 전투(1794년)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793년 라인강 근처 뷔비드에서의 도하 작전, 1796년 란 강 유역에서 거둔 대적 승리, 마인츠 봉쇄, 노이호프 전투, 레드니츠 강 도하, 알트도르프와 노이마르크 점령, 마인 강에서 장군 크라이 격파 등 일련의 전공은 그의 군사적 명성을 확고히 다져주었다.

이탈리아 원정

1797년, 베르나도트는 상브르에뮤즈 방면군 소속 2만 명을 이끌고 이탈리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합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젊은 장군 보나파르트에게 큰 호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의 야심을 의심했지만, 임무 수행에는 모든 역량을 다해 보탰다. 탈리아멘토 강 도하전에서 영광스러운 활약을 펼쳤고, 그라디스카, 트리에스테, 라이바흐, 이드리아를 점령했으며, 원정이 끝난 뒤에는 적에게서 빼앗은 군기를 총괄정부(Directory)에 헌상했다.

18 프뤽티도르 쿠데타 이후 베르나도트는 마르세유 지역 사령관직을 얻었으나, 이 지역의 소요 사태와 폭력적 조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돌아갔다.

캄포포르미오 조약 체결 후인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그는 빈 주재 프랑스 대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공관 건물에 삼색기를 게양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폭동을 일으켰고, 배상 요구가 거부되자 곧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이후 라슈타트를 거쳐 파리로 향했다.

육군장관 시절

1799년 관측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필립스부르크를 봉쇄하기 위해 라인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프랑스군이 고전하면서 이 계획을 접어야 했다.

30 프레리알 사건 이후 바라스의 영향력으로 1799년 7월 3일부터 9월 14일까지 육군장관을 지냈다. 그는 강경한 조치로 프랑스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했으며, 쿠데타 발생 시 신(新)자코뱅파의 '검'으로 여겨졌다.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던 군 서비스를 두 달 만에(7월 2일~9월 11일) 재정비했지만, 시예스의 술책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는 사임했고, 여러 가지 잘못이 그의 탓으로 돌려지면서 18 브뤼메르 직전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시골로 물러나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반대 입장을 밝혔고, 두 장군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보나파르트는 그를 계속 예우했다. 베르나도트의 아내 데지레 클라리(Désirée Clary)가 젊은 시절 보나파르트의 약혼녀이자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처남댁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도트는 국무회의에 들어갔고, 1800년에는 방데(Vendée) 지방의 서부군 사령관직을 수락했다. 그는 탁월한 배치로 영국군의 키베롱 상륙을 막고 지역의 평온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참모장이었던 시몬 장군이 꾸민 '소책자 음모', 이른바 '버터팟 음모'에 연루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푸셰가 이 사건을 덮었지만, 베르나도트는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제국 시대

뤼네빌 조약 이후 그는 미국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전쟁이 재개되면서 부임하지 못했다.

1804년에는 하노버 총독으로 파견되어 최초의 원수 서임식에서 원수 지팡이를 받았다. 그는 하노버에서 군단을 조직하여 여러 영광스러운 무공을 세웠다. 1805년에는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를 뮌헨에서 복위시키고 잘츠부르크 지방을 정복했다.

1805년, 베르나도트는 오스트리아군을 우회 포위함으로써 울름 항복에 크게 기여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의 필사적인 공격을 막아낸 프랑스군 중앙부대를 지휘했다.

1806년 6월 5일, 베르나도트 원수는 폰테코르보 공작(Prince of Pontecorvo)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프로이센 원정에서 제1군단을 지휘했는데,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당일 그는 인접한 두 전장 사이를 오가며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 행동 때문에 황제는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라는 명령에 서명할 정도로 분노했으며, 그의 소극성이 패배를 초래할 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할레 앞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뤼베크에서는 블뤼허를 포로로 잡고 항복을 강요하며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때 학살이 극심했음에도 베르나도트는 뤼베크의 생존 주민들, 특히 스웨덴 출신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폴란드로 진격하며 비스툴라 강을 건너 엘빙과 브라운스베르크를 점령했고, 1807년 1월 27일 모룽겐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으며, 6월 5일 파사르게 강에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프리틀란트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회복된 후 한자 도시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스웨덴에 대한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1808년 3월 13일 프랑스에 적대적이던 구스타프 4세가 혁명으로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적대 행위를 중단했다. 이런 충실한 처신 덕분에 스웨덴인들의 존경과 애정을 얻었지만, 나폴레옹 1세의 계획을 저해한 것으로 보아 황제의 불만을 샀다. 사실 베르나도트는 전장에서 빛나지 못한 면이 있다. 아우스터리츠와 아우어슈테트에서는 소극적이었고, 아일라우 전투에는 종전 후에야 도착했다.

틸지트 조약 이후 1809년까지 북독일 점령군을 지휘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결별하자 작센군 사령관을 맡았다. 작센인이 다수를 차지한 군단을 지휘하여 바그람 전투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지만, 황제가 전황 보고서에서 자신의 부대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여겨 전투 후 물러났다.

나폴레옹은 그를 외면했다. 1809년 7월 말, 푸셰의 도움으로 셸트 방면군을 얻었고, 월체런(Walcheren)에 상륙한 영국군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아 60일 만에 이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에는 다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스웨덴 왕세자가 되다

완전히 실각한 상태에서 그에게 왕좌가 제안되었다. 자식이 없던 스웨덴 국왕 카를 13세의 양자로 입적된 그는 1810년 8월 21일 외레브루에서 열린 의회(States General)에 의해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되었다.

그에게 부과된 유일한 조건은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오젠 드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는 바이에른 공주와 결혼한 탓에 이 조건을 감당할 수 없어 거절한 바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동의를 얻어 떠났다. 나폴레옹은 이 선택을 통해 북유럽의 든든한 동맹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부 관찰자들은 원수가 젊은 보나파르트의 옛 약혼녀 데지레 클라리와 결혼했다는 점도 이 승인의 배경으로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베르나도트는 10월 20일 개종했고, 헬싱보리에 상륙한 뒤 31일 의회에 소개되었다. 11월 5일 카를 13세의 양자가 되며 '카를 요한(Charles-Henri)'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처음에는 황제의 정책을 지지하고 대륙 봉쇄에도 동참했으며, 1811년부터는 양아버지의 병환 중에 왕국의 국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812년, 그는 스웨덴 항구를 모든 국가의 통상에 개방하는 칙령을 발표하도록 추진했다. 같은 해 그는 잠시 세계의 운명을 손에 쥐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도달하기 전, 그는 핀란드를 탈환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812년 초 프랑스군이 스웨덴 영토를 침범하면서 그는 나폴레옹과 결별했다. 황제가 기대한 동맹국이 아니라, 새 왕세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왕국의 이익을 우선했다.

제국이 흔들리는 것을 본 그는 1813년 스웨덴의 대프랑스 동맹 참여를 주도하며 재능 있는 장군의 면모를 보였다. 1813년 7월, 나폴레옹에게 자신의 처지의 위험을 일깨우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 끝에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고, 북독일 연합군의 지휘를 맡았다.

북방군 총사령관(Généralissime)으로 임명된 왕세자는 3만 명의 스웨덴군을 이끌고 슈트랄준트에 상륙하여 그로스베렌(1813년 8월 23일)에서 우디노를, 덴네비츠(1813년 9월 6일)에서 네이를 각각 격파했으며,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엘베 강을 따라 내려가 뤼베크를 점령하고 홀슈타인으로 진격하여 1814년 1월 14일 덴마크 국왕에게 킬 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이 조약으로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할양되었다. 그 후 그는 프랑스 방면으로 서서히 진격했고, 파리 강화 소식이 도착할 때까지 라인강을 건너지 않을 만큼 시간을 벌었다. 그는 프랑스 영토 침공에 대해 크게 항의하며 연합국이 약속을 저버렸다고 비난했고, 나폴레옹 1세를 설득해 강화를 이끌어내고 연합군의 라인 도하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대신해 제국 황좌에 오르기를 희망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자신의 조카 중 하나가 스웨덴 왕위에 오르는 일종의 '교환' 안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빈 회의는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정복고를 비준하는 것을 택했고, 덴마크 왕국에서 노르웨이 왕관을 떼어 스웨덴 군주에게 넘겼다.

스웨덴으로 돌아와 열렬한 환영을 받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맹국이 보장해 준 노르웨이로 진격하여 단 15일 만에 이를 정복했다(1814년).

1815년, 그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2차 동맹 참여를 정식으로 거부했다.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1818년 2월 5일, 전(前) 원수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서는 카를 14세 요한(Karl XIV Johan), 노르웨이에서는 카를 3세 요한(Karl III Johan)으로서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카를 요한은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번영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강제로 이루어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연합을 공고히 하면서도 두 민족에게 어느 정도 자체 헌법을 유지하도록 허용했고, 공교육, 농업, 산업,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1822년에는 예타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발트해를 연결했다. 그의 좌우명은 '국민의 사랑이 나의 보상이다'(스웨덴어: Folkets kärlek min belöning)였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동시대인들의 눈에는 다소 허황된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18세기의 역사와 고통스러웠던 스웨덴-노르웨이 연합(1905년 해체)의 세부사항을 잘 모르는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들은 그에 대해 비교적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한편 그는 두 왕국의 행정부와 궁정에 프랑스어 사용을 강요했다. 그 자신이 스웨덴어는 물론 노르웨이어를 배우는 것을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귀족들(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핀란드를 상실하며 실패한 구스타프 4세 아돌프 이후 필요했던 전쟁 지도자를 그에게서 찾았던 이들)의 평가가 대체로 긍정적인 반면, 노르웨이 애국자들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166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와의 동군연합(helstaten)에서 갓 벗어난 노르웨이를 1814년부터 스웨덴 왕관의 지배 아래 두는 일에만 몰두하며 노르웨이인의 일상적 요구와 자유 열망을 외면하는 그를 악의 화신, 자의적 통치자, 정치적 광기의 소유자로만 보았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스웨덴을 통치하고 있다.

관련 연구

2003년 툴루즈 2대학교 르 미라이(Le Mirail)의 FRAMESPA 연구소가 스톡홀름의 베르나도트 문서고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조사를 시작했다. 문서들은 스톡홀름 왕궁(Kungliga Slottet)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왕의 서명이 담긴 허가를 받고 소장처 간 파일 이관 절차를 거쳐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열람할 수 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어를 끝내 습득하지 못하고 행정 문서를 체계적으로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기 때문에, 이 문서고는 전부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이 조사의 총괄 책임자 장마르크 올리비에(Jean-Marc Olivier)는 2006년 10월 『북유럽사 리뷰(Revue d'histoire nordique)』 2호에 초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카를 14세 요한이 된 베르나도트를 주제로 한 석사 논문 이미 십여 편이 이 대학에서 심사를 통과했으며, '역사·예술·고고학' UFR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나폴레옹과의 서신 1810~1814』(파리, 1819)과 『서간·포고·연설집』(스톡홀름, 1825)이 출판되었다. 그의 전기로는 투샤르라포스(Touchard-Lafosse)의 것(1838)과 베르나르 사랑(Bernard Sarrans)의 것(1845)이 있다.

일화

생전에 카를 14세 요한은 어떤 의사에게도 가슴을 드러내고 진찰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비밀은 장례 시 신체를 정돈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이 공화국의 옛 군인의 가슴에는 '왕에게 죽음을!'(또는 '폭군에게 죽음을!')이라는 문구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예테보리의 스웨덴 찰머스 대학교는 그의 좌우명을 프랑스어로 채택하여 그를 기렸다. 'Avancez!'(전진하라!).

1780년, 파리 위병소의 젊은 병사였던 베르나도트는 시인 니콜라 질베르(Nicolas Gilbert)로부터 10루이의 유증을 받기도 했다.

장 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프랑스 병사에서 스웨덴 국왕이 된 남자
베르나도트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