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총재정부(1795~1799): 테러 이후 탄생한 집단 통치의 시대

1789년 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린 '테러 시대'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1794년 7월, 테러의 화신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 비로소 진정의 조짐이 나타났고, 권력을 여럿이 분담하는 집단 통치에 대한 열망이 커졌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총재정부(Directory)입니다.

총재정부 시기

1795년 10월 26일 ~ 1799년 11월 9일

주요 인물

  • 폴 바라스(Paul Barras)
  •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通 그라쿠스 바뵈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라자르 카르노
  • 루이마리 드 라레베이에르렉포
  • 에티엔프랑수아 르투르뢰르
  • 장프랑수아 루벨
  • 에마뉘엘조제프 시예스
  •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

정부 운영 방식

테러가 종식되자 새로운 정부 수립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국민공회는 '3년 헌법'을 제정했는데, 이 헌법은 보통남성선거권을 폐지하고 납세액에 따른 선거 자격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입법권을 담당하기 위해 오백인회(Council of Five Hundred)와 원로원(Council of Elders)이라는 두 개의 의회가 선출되었습니다. 오백인회가 법안 발의권을 가지며, 원로원은 이를 승인하거나 기각할 수 있었습니다. 두 의회는 3년마다 3분의 1씩 개선되었고,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아울러 오백인회가 추천하고 원로원이 선출하는 다섯 명의 총재가 행정부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정부 명칭의 유래입니다. 초대 총재는 바라스, 루벨, 카르노(시예스를 대신하여), 르투르뢰르, 라레베이에르렉포였습니다.

테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향락주의가 차지했습니다. 혁명의 최대 수혜자인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지는 특히 복장에서 두드러지게 사치와 기행을 드러내며 부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심함 속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은 외면당했습니다. 불평등은 극에 달했고, 빈곤과 치안 불안이 만연했으며, 아시냐(혁명 지폐)는 폭락했고 정치인들의 부패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재정부는 1796년 2월 19일 아시냐를 폐기하고 새로운 지폐와 영토 담보 증서를 도입했으나, 이는 수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야코뱅파인 그라쿠스 바뵈프는 『평등자의 선언』을 발표하고, 1796년 '평등파 음모 사건'을 통해 총재정부 타도를 꾀했으나 이듬해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더욱이 총재정부는 국내의 방데 지역 반란과 유럽 전역의 왕당파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군사적 승리(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로 잠시 숨을 돌리고, 재정 안정화와 사회 개혁(이혼 제도 등)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권력은 여전히 불안정했습니다. 1799년에는 새로운 유럽 왕정 연합군이 프랑스를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고, 시예스와 탈레랑이 계획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행한 쿠데타가 마침내 1799년 11월 9일에 실현됩니다.

결과와 평가

  • 총재정부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정치적 내분과 양원 간 상호 우위가 없는 견제 구조의 한계로 행정 마비가 거듭되며,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위기에 놓였습니다. 야코뱅파와 왕당파라는 양대 반대 진영 사이에 끼인 총재정부는 결국 군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군대는 여러 차례 이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쿠데타는 영사정부(Consulate)의 막을 올렸으며, 영사정부는 곧 제1제국으로 가는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