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제국 원수 구비옹-생시르 후작 로랑(Laurent Gouvion-Saint-Cyr)

로랑 드 구비옹-생시르 후작(Laurent, Marquis de Gouvion-Saint-Cyr)은 1764년 5월 13일 툴(Toul)에서 태어나 1830년 3월 17일 이에르(Hyères)에서 생을 마친 프랑스 제국의 원수이자 정치가입니다.

프랑스 제국 원수 구비옹-생시르 후작 로랑(Laurent Gouvion-Saint-Cyr)
로랑, 구비옹-생시르 후작

프랑스 혁명기의 활약

회화와 연극을 잠시 접해 본 뒤 무기를 택한 로랑 구비옹은 친척이던 장바티스트 구비옹(Jean-Baptiste Gouvion) 소장의 인연으로 1789년 파리 국민방위대 참모부에 들어섰습니다.

1792년 9월 1일 공화국 엽병 제1대대에 자원입대하면서, 그는 동료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어머니의 성씨였던 '생시르(Saint-Cyr)'를 이름에 덧붙였습니다. 같은 해 11월 1일 대위로 승진했고, 1793년 2월에는 레오나르 오노레 게 드 베르논(Gay de Vernon) 장군의 부관이 되었으며, 9월에는 대대장 겸 페레(Ferey) 장군의 참모장에 올랐습니다. 라인 방면군의 여러 참모직을 두루 거치며 눈부신 출세 가도를 달려, 1794년 6월 5일 준장, 불과 6일 뒤인 6월 11일에는 사단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1795년 마인츠 포위전에서는 피셰그루(Pichegru)와 클레베르(Kléber)의 지휘 아래 복무했으며, 1794년 11월 프림(Pfrimm) 강에서 패배를 당해 후퇴를 조직해야 했지만, 같은 해 12월 5일에는 드스퐁(Deux-Ponts, 츠바이브뤼켄)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라인-모젤 방면군 좌익, 그리고 중앙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프랑스 제국 원수 구비옹-생시르 후작 로랑(Laurent Gouvion-Saint-Cyr)
로랑, 구비옹-생시르 후작

총재정부 시기

1796년 그는 라슈타트와 에틀링겐 전투에 참전하고 7월 18일 슈투트가르트를 점령했으며, 연말에는 켈(Kehl) 방어전을 지휘했습니다. 1797년 말에는 급서한 호슈(Hoche)의 뒤를 이어 라인-모젤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바젤 주교령을 침공했습니다. 이듬해인 1798년 3월 26일부터 7월 25일까지는 로마 방면군에서 마세나(Masséna)를 대신 지휘했으나, 권한 남용 혐의로 정직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후 독일 전선으로 돌아와 다뉴브 방면군 좌익을 지휘하며 1799년 3월 25일 슈토크흐(Stockach) 전투에 참여했고, 이어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옮겨 제노아를 통치한 뒤 모로(Moreau)의 부관으로 라인 방면군에 복귀하여 1800년 5월 9일 비버라흐(Biberach)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집정정부와 제1제국 시기

그러나 그는 상관 모로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고, 결국 휴가를 청했습니다. 모로를 신뢰하지 않던 보나파르트는 그를 국무회의 의원으로 임명하고, 1801년 포르투갈 전쟁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지휘권을 넘겼습니다. 1801년에는 루시앙 보나파르트와 함께 마드리드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한 뒤 나폴리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 선포에 대한 명확한 지지 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초의 원수 명단에서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1805년 그는 이탈리아에 머물며 나폴리 방면군을 지휘했고, 1806년 말부터 1808년 8월까지는 불롱 캠프 지휘관으로 좌천되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1808년 5월 제국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8월에는 카탈루냐 전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뛰어난 전술가였던 구비옹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바르셀로나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해소했습니다. 그러나 베로나, 타라고나, 토르토사를 동시에 포위하라는 실행 불가능한 명령을 거부하면서 오주로(Augereau)로 교체되었고, 후임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후 체포된 그는 1811년 국무회의 의원으로 복직될 때까지 한동안 전선에서 멀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대육군 제6군단을 지휘하여 8월 18일 폴로츠크(Polotsk)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국 원수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의 엄격함과 낮은 사교성이 늦게까지 승진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1813년 8월에는 드레스덴 방어를 지휘하다가 도시가 항복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황제를 찬양할 일이 거의 없었던 그는 백일천하 기간 나폴레옹에게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왕정 복고 후 루이 18세는 그를 육군 장관(1815년 7~9월)으로 임명했고, 이후 구비옹-생시르 후작으로 서임했습니다.

왕정복고기

복고 왕정 시기 그는 해군 장관과 육군 장관(1817~1819년)을 역임하며 군대를 탁월하게 재편성했고, 징병 제도 개혁법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1817년에는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에 새겨져 있습니다.

프랑스 제국 원수 구비옹-생시르 후작 로랑(Laurent Gouvion-Saint-Cyr)
구비옹 가문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