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원수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1766년 10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나 1847년 5월 29일 생테티엔에서 세상을 떠난 에마뉘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는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백일천하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귀족 출신 군인이자 프랑스 원수였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원수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혁명 전쟁 시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루시는 1780년 스트라스부르 포병학교를 거친 뒤 기병으로 전과하여 왕실 근위대에서 중령 계급까지 올랐다. 새로운 사상에 공감했던 그는 카바니스와 콩도르세의 매제였으며, 정치적으로 위험해질 수 있는 근위대 신분을 스스로 내려놓고 일반 기병 부대로 옮겨갔다.

1792년 야전사령관으로 승진한 그는 사부아 정복에 참여한 후 잠시 가족 곁으로 물러났다. 1793년 5월 소집되어 방데 반군으로부터 낭트를 방어했지만,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직무가 정지되고 군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794년 11월 복직하였고, 1795년 4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서부군에서 호슈 장군의 참모총장을 맡아 퀴브롱 작전에 참여했으며, 북부군에서 잠시 복무한 뒤 다시 서부로 돌아와 아일랜드 원정에도 동행했다. 다만 상륙을 거부한 부베 제독에게 적극적으로 맞서지는 못했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원수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전역

1798년 11월 토리노 성채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그루시는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의 퇴위를 강요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1799년 8월 15일 노비 전투에서는 열네 곳이나 부상을 입고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1800년 석방된 뒤 같은 해 여름 그리종 방면군을 지휘하여 엥가딘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라인군에 배속되어 유명한 호헨린덴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모로 장군과의 친분은 보나파르트의 의심을 사는 결과를 낳았고, 그루시는 1805년 오스트리아 전역이 시작될 때까지 중요한 지휘관 자리를 배정받지 못했다. 이후 울름 포위전에 참여하고 티롤 방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806년에는 예나 전투 이후 프로이센군 잔존 병력을 끝까지 추격하여 호엔로에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807년에는 아일라우와 프리트란트 전투에서 싸우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제국 백작에서 원수로

1808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마드리드 총독으로 재임한 그루시는 같은 해 5월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이듬해 초에는 제국 백작에 서임되었고, 1809년 6월 14일 라바 전투의 승기를 결정지었으며, 바그람 전투에서는 용기병 부대를 이끌고 주력을 엄호했다.

러시아 원정 당시에는 제3기병군단을 지휘하여 모스크바강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에도 참전했다. 특히 재앙적인 철수 행군 동안 황제를 직접 호위한 '성스러운 기병대'의 지휘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안위를 책임졌다.

에마뉘엘 드 그루시 후작 —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원수
그루시의 무기

몰락과 복권

1813년, 나폴레옹이 자신을 계속 기병 지휘관으로 묶어두려 한 반면 그루시는 보병 지휘관 자리를 희망하면서 황제와 갈등을 빚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본토가 연합군에 침공당하자 즉시 복귀하여, 이미 잔재만 남은 대육군 기병대를 이끌고 브리엔, 로티에르, 몽미라유, 트루아, 크라온 등지의 전투에서 분전했으며, 특히 크라온에서 중상을 입었다. 첫 번째 왕정복고 기간에는 기병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귀환하자 그루시는 주저 없이 황제의 편에 섰다. 남부군 사령관으로서 앙굴렘 공작의 왕당파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고, 이 공로로 1815년 4월 15일 프랑스 원수로 서임되었다.

워털루의 비극

그러나 그의 명예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오점을 남겼다. 대포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진군하여 황제를 구원하는 대신, 종적을 감춘 프로이센군 추격이라는 명령에 지나치게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 경직된 명령 준수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오늘날까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 후 그루시는 잔존 병력의 질서 있는 철수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추방령을 받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보냈다.

1831년과 1832년에 걸쳐 원수와 프랑스 귀족원 의원으로 복위된 그루시의 이름은 오늘날 에투알 개선문에 새겨져 있으며, 그의 복잡한 삶과 함께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