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의 명장 앙드레 마세나 — 리볼리 공작, 에슬링 왕자

앙드레 마세나: 리볼리 공작, 에슬링 왕자

앙드레 마세나(André Masséna)(1758년 5월 6일, 니스 ~ 1817년 4월 4일, 파리)는 프랑스 제국 원수로, '리볼리 공작(Duc de Rivoli)'과 '에슬링 왕자(Prince d'Essling)' 칭호를 받은 나폴레옹 휘하의 대표적인 명장이다.

나폴레옹의 명장 앙드레 마세나 — 리볼리 공작, 에슬링 왕자
앙드레 마세나, 리볼리 공작이자 에슬링 왕자

구체제 시기: 고아에서 군인으로

당시 피에몬테에 속한 니스에서 태어난 마세나는 어린 시절을 르방(Levens)에 있던 가족의 저택인 시가(Siga)와 세레(Serret)에서 보냈다.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상선 선원 견습생으로 바다에 나섰다. 이후 왕립 이탈리아 연대(Royal-Italien)에 입대하여 숙부와 함께 14년간 복무했는데, 이 시절 숙부에게 지도를 읽는 법 등 군사적 기초를 배웠다. 그는 부관(adjutant) 계급까지 올라섰는데, 이는 당시 평민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

잠시 밀수업자로 지내다가 국민위병에 가담했고, 장교로 선출되었다.

1792년 대령에 임명된 그는 공화국군 소속으로 피에몬트 첫 원정에 참전했다. 1792년 9월 29일 다르셀름(d'Anselme) 장군이 프랑스군을 이끌고 니스 백령을 점령하며 니스에 입성했을 때, 마세나는 반혁명 세력인 바르베(barbet) 운동에 대한 가혹한 진압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승진은 매우 빨랐다. 1793년 8월 22일 준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20일에는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이탈리아군에 배속되어 1794년 8월 사오르조(Saorgio)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795년 사단장으로서 이탈리아군의 우익을 지휘했으며, 로아노(Loano) 전투의 승리 역시 그의 공로였다.

이탈리아 전역

마세나는 이탈리아군 전위부대의 지휘권을 받았다. 1797년 1월 14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리볼리(Rivoli) 전투에서 그의 활약은 결정적이었다. 이틀 만에 170km를 기동한 공적을 두고 보나파르트는 그에게 '승리의 총애아(enfant chéri de la victoire)'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의 체계적인 약탈 행위—특히 전당포 약탈—때문에 일부에서는 이 별명을 '승리의 썩은 자식'이라고 바꿔 부르기도 했다.

총재정부에 의해 교황령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급료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폭동을 극도로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장교들의 적대감에 직면하여 결국 물러나야 했다.

1797년 9월 18일과 19일의 쿠데타 이후, 마세나는 라자르 카르노와 프랑수아 드 바르텔레미를 대신할 총재 후보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798년 2월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1799년에는 헬베티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군대는 6월 4일 취리히에서 패배를 당했지만, 9월 25일과 26일 벌어진 취리히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와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프랑스 본토로 밀려들려던 제2차 대동맹군의 물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제2차 이탈리아 원정

1800년 제노바에 갇힌 채 석 달간 버틴 끝에 6월 4일 항복했다. 열흘 뒤 벌어진 마렝고(Marengo) 전투에는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약탈 혐의로 해임되었다.

집정정과 제정 시대

1803년 7월 입법부 의원이 되었으나, 종신 집정에 대한 표결에서는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1804년에는 프랑스 원수의 지팡이를 수여받았다.

나폴레옹의 명장 앙드레 마세나 — 리볼리 공작, 에슬링 왕자

1805년에는 명예훈장 최고장(Grand Aigle)을 받고 다시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소환되어 나폴리 왕국 정복과 칼라브리아 평정을 수행했다. 베로나를 함락시키는 부대를 지휘하고 조제프(Joseph)를 나폴리 왕위에 앉히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패전국의 재산을 독점한 혐의로 또다시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1808년에는 공작 작위를 얻었다.

1807년 대육군 우익 사령관을 맡아 리볼리 전투에서 빛나는 공적을 세운 그는 상당한 몫의 영지와 함께 리볼리 공작에 봉해졌다. 한편 파리 근교의 사냥터에서 베르티에(Berthier)가 실수로 발사한 총격 때문에 한쪽 눈을 잃는 불운도 겪었다.

1809년 아스펜-에슬링(Aspern-Essling) 전투에서는 말이 토끼굴에 발을 걸려 낙마했지만, 곧바로 선술집에서 지휘를 이어갔다. 전위인 4군단이 고립되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야 탈출했을 무렵, 낙마한 그를 공격하던 적군 기병 한 명을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 전공으로 그는 에슬링 왕자 칭호를 받았다. 이후 바그람(Wagram) 전투의 승리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부상당한 몸으로 수레에 실린 채 전열을 순회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1810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는 포르투갈 침공을 지휘하며 부사코(Buçaco) 전투를 치렀고, 연합군을 토리스베드라스(Torres Vedras) 방어선까지 후퇴시켰다. 그러나 이듬해 연합군이 증원을 받으면서 바로사(Barrosa)와 푸엔테스데오뇨로(Fuentes de Oñoro) 전투 이후 철수해야 했고, 지휘권은 오귀스트 드 마르몽(Auguste de Marmont)에게 넘어갔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 1세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유명한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전역에도 기용되지 못했다. 다만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황제는 그에게 제8군관구(마르세유) 사령관직을 맡겼다.

왕정복고와 말년

루이 18세는 그를 계속 등용하여 귀족원 의원이자 생루이 훈장 사령관장으로 임명했으며, 귀화 허가장도 하사했다.

1815년 백일천하 기간 동안 그는 어떤 관직도 받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유지했다. 백일천하 동안 마르세유 지역의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했으나, 이후 초왕정파가 요구한 서약은 거부했다.

임시정부 아래에서는 국민위병을 지휘했으며, 네(Maréchal Ney) 원수를 심판하기 위해 소집된 군사법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3월 20일 의회에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그는 이 모함에 대해 스스로 해명했다.

마세나는 1817년 4월 4일,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에 걸쳐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는데, 이 재산은 아내가 잘 관리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