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갈릴리(Galilee): 이스라엘 북부, 역사와 신앙이 얽힌 땅

갈릴리, 고대 팔레스타인의 최북단

갈릴리(Galilee)는 히브리어로 하갈릴(Ha-galil)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고대 팔레스타인 최북단에 위치하며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경계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서로 엇갈리는 해석들을 종합해 보면 이 지역이 북방 지파 가운데 납달리 지파의 영토 일부였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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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가 기록한 갈릴리의 경계

이 구릉지대의 경계는 로마 출신 유대계 역사가 요세푸스(1세기)에 의해 처음으로 명확히 규정되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갈릴리는 서쪽으로 아코(악카)와 카멜 산, 남쪽으로 사마리아와 벧셰안(스키토폴리스), 동쪽으로는 요단강 동안(트랜스요르단)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고대 바카(오늘날의 베제트로 추정)를 지나는 선까지입니다. 이 선은 대체로 오늘날 이스라엘–레바논 국경과 일치하며, 일부 지리학자들은 북쪽 경계를 리타니 강(나흐르 알리타니)까지 확장하기도 합니다.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

갈릴리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뉩니다. 상부 갈릴리(중심 도시: 사페드)는 깊은 협곡과 골짜기로 갈라진 높은 산봉우리가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인 반면, 하부 갈릴리(중심 도시: 나자렛)는 완만하고 낮은 구릉이 펼쳐진 지역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공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을 당시, 갈릴리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사기(1:30~33)의 기록에 따르면 여호수아의 정복 이후에도 유대인과 가나안인은 이 땅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기원전 10세기) 치세에 갈릴리는 그들의 확장된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로 넘어갔습니다.

아시리아의 침공과 예수의 고향

기원전 734년, 아시리아 왕 티글랏필레세르 3세가 이스라엘 왕국을 격파하면서 갈릴리의 유대 인구 대다수는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그 후 이 지역은 예수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그의 공중 사역 대부분이 벌어진 무대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전해지는 기적들 대부분도 갈릴리에서 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 70년 제2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로마가 팔레스타인 유대 학문의 중심지를 갈릴리로 옮겼습니다.

아랍 정복 이후와 카발라의 중심지

636년 아랍의 정복 이후 갈릴리는 크게 쇠퇴하여 가난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사페드가 유대교의 밀교적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주요 중심지로 부상하며 새로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시오니즘 정착 운동과 근대의 부흥

갈릴리 지역의 근대적 부흥은 시오니즘 정착 운동의 결과물입니다. 1882년 로슁피나(히브리어로 '모퉁이 돌'이라는 뜻) 마을을 시작으로 일련의 정착촌이 세워졌고, 이러한 정착지들은 1920년 갈릴리 전역이 영국 위임통치령에 포함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협상 근거가 되었습니다.

유엔 분할 계획과 1948년 전쟁

1947년 11월 발표된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은 갈릴리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로 나누는 안을 담고 있었으나, 계획상 세워지기로 했던 아랍 국가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갈릴리 전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후라 호수의 배수와 지형의 대변혁

1950년대 갈릴리에서는 팔레스타인 지형 전체를 바꾸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호(갈릴리 바다) 북쪽의 늪지대였던 후라 호수가 배수되었고, 그 결과 후라 계곡은 비옥한 농경지로 탈바꿈했으며 요단강 상류 구간은 직선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