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774년 7월 20일 프랑스 샤티용쉬르센 출생 ~ 1852년 3월 3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망

- 오귀스트 프레데리크 루이 비에스 드 마르몽, 라구사 공작
나폴레옹과의 인연, 초기 군 경력
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몽은 1792년 샬롱의 포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툴롱 공방전 당시 보나파르트를 처음 만났으며, 1796년 2월에는 그의 부관(aide-de-camp)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원정에 따라가며 적에게서 빼앗은 군기를 정부(총재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포병 여단장으로 승진한 뒤에도 계속 보나파르트의 부관 자리를 유지했으며, 동방 원정에도 함께했습니다. 몰타에서 성 요한 기사단의 군기를 탈취한 공으로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집트 원정 기간에는 주요 전투에 모두 참전했고, 알렉산드리아 사령관으로서 1799년 2월 3일 영국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습니다.
보나파르트와 함께 배 무이론 호를 타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의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같은 해 12월 25일 국참사원 의원에 임명되어 제1통령을 수행하며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마렝고 전투에서는 포병을 직접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800년 9월 불과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사단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802년에는 초대 포병 총감에 임명되었으며, 1805년에는 대육군 제2군단을 지휘하여 울름(10월 21일)과 베이어(11월 3일)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달마티아 통치와 제국 원수 진봉

- 마르몽의 문장
달마티아 총독으로 부임한 마르몽은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라구사 공성전을 풀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 공로로 1808년 그 도시의 이름을 딴 '라구사 공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새로운 영토가 된 달마티아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도로와 학교를 건설하는 등 행정적 역량도 발휘했습니다.
1809년에는 오스트리아군을 북쪽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괴스피히(5월 20일)와 피우메(5월 29일)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그라츠를 점령했으며, 바그람 전투에서는 예비대를 지휘하고 즈나임(7월 9일)에서 적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이러한 전공 덕분에 7월 12일 제국 원수로 진봉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후 일리리아 속주 총독으로서 다시 달마티아로 돌아갔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과 좌절
1811년 마르몽은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되었습니다.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포위를 풀어내고(9월 24일)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웰링턴 공작과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1812년 4월 12일에는 카스텔루브랑쿠까지 진격했으나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아라필레스 전투(1812년 7월 22일)에서 패배하는 등 큰 타격을 입으면서 부상까지 당했습니다. 이후 1813년 초에야 지휘권을 되찾았고, 이후 작센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 대부분에 참전하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좌익을 지휘했습니다.
프랑스 방어전과 말년
샹파뉴 방면군에서 제6군단을 지휘한 마르몽은 브리엔(1814년 1월 29일), 라 로티에르(2월 1일), 샹포베르(2월 10일), 보샹(2월 14일), 몽미라유(2월 17일) 등 연이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전술 역량에도 불구하고 라옹 전투(3월 9일 밤부터 10일)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마지막 전투들까지 지휘한 것 역시 마르몽이었으며, 그는 파리 방어를 담당하고 항복 협상까지 주도했습니다.
왕정이 복고된 후 루이 18세는 그를 프랑스 귀족으로 임명했고, 마르몽은 왕이 간트로 망명하는 동안 그곳까지 수행했습니다. 두 번째 왕정복고 이후에는 국무장관(1817년 11월 30일)에 임명되었고, 1821년부터 1830년까지 파리 총독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1830년 7월 혁명 당시 봉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샤를 10세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파리 에투알 개선문에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