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 2월 2일 ~ 1838년 5월 17일)는 프랑스 혁명기부터 7월 왕정까지 격동의 반세기를 관통하며 권력의 핵심에 선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절름발이 악마(le diable boiteux)'라 불리며 배신자이자 부패의 화신으로 매도당하기도, 계몽주의 이념에 충실한 프랑스의 충복으로 추앙받기도 했던 그는 당대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이었다.
가문과 유년 시절: 버림받은 후계자
탈레랑은 9세기 샤를 대왕으로부터 페리고르 백작 작위를 받은 빌그림(Wilgrim)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다니엘 드 탈레랑-페리고르 백작과 어머니 알렉산드린 드 다마 도티니는 루이 15세 치하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탈레랑이 네 살 때 낙마 사고로 다리를 저는 장애를 입자 가문의 장자 상속권에서 배제하고 성직자의 길로 내몰았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사고가 내 인생 전부를 결정지었다... 대가문에서는 가문을 사랑하지 개인을, 그것도 아직 알지도 못하는 어린 개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부모에 대한 냉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할머니 손에서 페리고르 지방에서 보낸 유년기를 제외하면, 그는 아르쿠르 학교(현 생루이 고등학교)와 생술피스 신학교에서 엄격한 성직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에도 코메디 프랑세즈의 여배우 도로테 도랭빌과 공개적으로 교제하는 등 속세의 삶을 향한 본능을 숨기지 않았다.
성직자 경력과 혁명의 전야
1779년 사제 서품을 받고 1780년 삼촌의 후원으로 프랑스 성직자 총대리(Agent général du clergé)가 된 탈레랑은 교회의 막대한 재산과 재정 실태를 꿰뚫게 되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살롱을 드나들며 미라보, 칼론 등 당대 지성 및 정치인들과 교류했고, 1786년 영국과의 통상 조약 협상에 참여하는 등 현실 정치 감각을 익혔다. 방탕한 사생활과 도박으로 국왕의 눈 밖에 나 주교 서임이 늦어지던 중, 1788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오툰 주교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혁명: 성직자에서 혁명의 주역으로
제헌의회와 인권 선언
1789년 삼부회에서 성직자 대표로 선출된 탈레랑은 제3신분 편에 서서 혁명의 선봉에 섰다. 그는 헌법 기초 위원회 최초의 위원이 되었고, 『인권 선언』 제6조(법은 일반 의지의 표현이며,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를 기초했다. 1789년 10월 10일, 국가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해 교회 재산 몰수를 제안하여 통과시켰고, 유대인 시민권 부여, 도량형 통일안 등 근대적 입법의 기틀을 다졌다. 1790년 7월 14일 연합축제(Fête de la Fédération)에서는 30만 군중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혁명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했다.성직자 민법과 망명
1790년 성직자 민법 선서 후 주교직을 사임하고 헌법파 주교들을 축성한 일로 교황 비오 6세로부터 파문당했다. 1792년 런던 외교 특사 임무를 수행하며 영국의 중립을 이끌어냈으나, 공포 정치의 전조를 느끼고 단톤의 여권으로 다시 런던으로 망명했다. 1794년 영국에서 추방당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부동산 중개와 상품 거래로 생계를 잇다가, 1796년(나폴레옹력 4년)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귀국했다.총재정부와 나폴레옹 시대: 권력의 2인자
귀국 후 학사원 회원이 된 탈레랑은 1797년 바라스 총재의 신임으로 외무장관에 올랐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서신 교환을 시작하며 서로의 가치를 간파했다. "보나파르트라는 이름만으로도 협상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탈레랑의 편지에 나폴레옹은 "그의 안목을 존중한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총재정부가 주요 외교를 직접 챙기면서 탈레랑은 집행자 역할에 머물렀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나폴레옹, 시예스와 공모해 성공시킨 뒤, 제1집정 나폴레옹 아래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콩코르다트(1801)로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1802년 발랑세 성을 매입해 외교 무대의 거점으로 삼았다. 1804년 앙기앵 공작 처형에 관여한 뒤 대침실장(Grand Chambellan)에 올랐고, 나폴레옹 대관식에 참석했다.
나폴레옹과의 결별: 에르푸르트의 배신
탈레랑은 나폴레옹의 끝없는 정복 전쟁을 경계하며 유럽 균형 외교를 주장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 1806년 라인 동맹 조약 체결에 마지못해 서명했고, 1807년 틸지트 조약 후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프랑스 국민은 문명되었으나 군주는 아니며, 러시아 군주는 문명되었으나 국민은 아니다"라며 나폴레옹과 동맹하지 말 것을 권고한 '에르푸르트의 배신'은 결정적 결렬을 가져왔다. 1809년 나폴레옹은 그를 면전에서 "비단 스타킹을 신은 똥덩어리"라 모욕하며 대침실장직을 박탈했으나, 그의 능력은 여전히 필요해 측근으로 남겨두었다.제1차 왕정복고와 빈 회의: 외교의 정점
1814년 나폴레옹 몰락 직전, 탈레랑은 신속히 움직여 파리를 연합군에 넘기고 루이 18세를 옹립했다. 임시 정부 수반이자 외무장관으로서 빈 회의(1814~1815)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 패배국 프랑스를 '승전 4강(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의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외교적 기적을 연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영국과 손잡고 프로이센·러시아의 과도한 요구(작센 합병, 폴란드 지배)를 저지하며 프랑스의 1792년 국경을 거의 그대로 지켰다. 샤토브리앙은 그를 두고 "악덕이 부축하는 범죄, 배교한 주교가 왕의 형제 앞에 무릎 꿇는다"고 저주했지만, 탈레랑은 프랑스의 국체 보존이라는 대의를 달성했다.
백일천하(나폴레옹 귀환) 때 루이 18세를 수행해 망명했다가 워털루 전투 후 복귀, 국무회의 의장에 올랐으나 극우파(울트라)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대침실장으로 물러났다.
7월 왕정과 말년: 역사의 증인
1830년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가 들어서자, 탈레랑은 주영 대사로 임명되어 영국의 중립을 확보하고 벨기에 독립을 중재하며 영불 화해의 기틀을 닦았다. 웰링턴 공작과의 우정, 러시아 대사 부인 리벤 공주와의 설전( "폐하께서 15년 전 알렉산드르 황제가 원하셨던 대로 혁명이 일어났다면 유감이 없었을 것") 등은 그의 노련한 외교술을 보여준다. 1834년 은퇴 후 발랑세 성에서 발자크 등을 맞으며 회고록을 정리했다.
1838년 임종 직전, 뒤팡루 신부의 권유로 교회에 귀의해 종부성사를 받았다. 신부가 관례대로 손등에 성유를 바르려 하자 "내가 주교임을 잊지 마시오"(손바닥이 아닌 손등에 바르는 주교 예식을 상기시키며)라고 말하며 평생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루이 필리프 국왕이 예법을 어겨가며 문병을 올 정도였고, 5월 17일 84세로 영면했다. 국장과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고, 발랑세 성당 지하 납골묘에 안장되었다.
당대인의 평가와 후세의 재조명
탈레랑을 향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렸다.
- 플로베르: "탈레랑(공작): 분개하라"(『수상한 사전』)
- 발자크: "발만 절름발이인 어떤 공작... 천재적 정치가라 보며, 그 이름은 역사에 커지리라"
- 라마르틴: "사치는 탈레랑에게 정치이자 삶의 우아함이었다"
- 조르주 상드: "자연의 예외, 희귀한 괴물... 인류는 그를 경멸하면서도 어리석은 감탄으로 바라보았다"
- 나폴레옹: "비단 스타킹을 신은 똥덩어리" (탈레랑: "이토록 위대한 이가 이토록 무례하다니 유감")
- 생트뵈브: "뛰어난 지성, 명쾌한 분별력, 세련된 취향, 그리고 체념과 태만으로 위장된 완숙한 부패... 이 기묘한 조합이 탈레랑이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의 전부다"
그는 울트라 왕당파(혁명가), 가톨릭 교회(교회 재산 몰수), 자코뱅파(혁명 배신자), 보나파르트파(에르푸르트 배신) 모두에게 미움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다수의 전기 작가들은 '프랑스'라는 한 가지 이상에 평생 복무한 일관성을 들어 그를 재평가하고 있다. 부패와 배신, 천재와 냉소가 공존한 그의 삶은, 이념의 시대를 살아남은 현실 정치가의 초상으로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