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794년 플뢰뤼스 전투: 프랑스 혁명군의 결정적 승리와 세계 최초 군사용 관측 풍선

1794년 플뢰뤼스 전투: 프랑스 혁명군의 결정적 승리와 세계 최초 군사용 관측 풍선

플뢰뤼스 전투 개요

1794년 6월 26일(혁명력 2년 메시도르 8일), 플뢰뤼스 전투가 영국,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의 샤를루아와 나뮈르 사이에 위치한 플뢰뤼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작센코부르크 공이 지휘하는 연합군은 샤를루아의 포위를 푸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그 도시가 이미 전날 비밀리에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연합군은 다섯 개 종대로 편성되어, 상브르 강 양쪽 끝에 기반을 둔 채 샤를루아 주변으로 호(arc) 모양을 이루며 배치된 프랑스군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전투 경과

프랑스군 좌익은 먼저 몽소 숲을 지나 마르시엔까지 후퇴했으나, 그곳에서 제국군은 샤를루아 함락 소식을 접하고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레베르 장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려 적을 후퇴시켰습니다.

중앙의 몰로(Morlot) 부대는 고슬리(Gosselies)로 물러났고, 샹피오네(Championnet) 부대 역시 에피니(Heppignies)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Jourdan)이 증원군을 이끌고 와 마지막 마을을 탈환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제국군 보이외(Beaulieu) 장군이 새로운 종대와 함께 도착했지만, 주르당은 예비대를 투입했고 프랑스군은 막대한 노력 끝에 랑부자르(Lambusart) 마을을 사수했습니다. 이로써 전선 곳곳에서 전투가 재개되었고, 하루가 저물어 갔습니다. 보이외 역시 샤를루아 함락 소식을 듣고 후퇴했으며, 코부르크는 브뤼셀로의 총후퇴를 명령하기로 결정합니다.

전투는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작물에 불이 붙으면서 실제 화염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저녁 무렵, 코부르크 공은 지친 몸으로 전장을 버리고 떠났으며, 그 자리에는 5,000명의 사상자가 남겨졌습니다.

전투의 결과

다음 날 연합군은 벨기에를 포기하고 독일 방면으로 후퇴했습니다. 제국군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영구히 잃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브뤼셀(7월 10일)과 안트베르펜(7월 27일)을 차지했고, 영국 원정군은 다시 배에 올랐습니다. 오늘날 벨기에 영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9월 18일 스프리몽(Sprimont)에서 치러졌습니다.

세계 최초의 군사용 관측 풍선

이 전투는 기구(氣球) 역사상 최초로 관측 풍선이 군사적으로 사용된 전투로 기록됩니다. 쿠텔(Coutelle) 기구 중대의 대위와 한 명의 장교가 풍선에 탑승해 연합군의 배치를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 '스파이 풍선'의 존재는 연합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랑트르프르낭(L'Entreprenant)' 호의 특징

  • 지름 27피트(약 9미터)의 완벽한 구형 기체
  • 523㎥의 용량에 수소(H₂)로 팽창
  • 기체 외피의 방수 처리는 장마리조제프 쿠텔과 니콜라자크 콩테(연필의 발명가)가 담당. 덕분에 '랑트르프르낭' 호는 상브르에무즈 군에서 두 달 동안 가스가 새지 않고 유지됨
  • 풍선은 두 사람이 탄 바구니를 들어올려 500미터까지 상승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250~400미터만 되어도 작전에 충분했습니다. 관측 결과를 신속히 전달하기 위해 해군 신호 코드의 깃발을 사용하거나, 메모한 종이를 케이블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오는 작은 가죽 주머니에 담아 지상으로 전송했습니다.

플뢰뤼스 전투 관측 장소

계류 풍선 '랑트르프르낭' 호는 쥐메(Jumet)의 고원, 현재 TEC 샤를루아 차고와 고슬리 공항 활주로 서쪽 끝이 위치한 곳에서 떠올랐습니다. 프랑스군 주르당 장군의 참모부와 국민대표 기통 드 모르보(Guyton de Morveau), 질레(Gillet), 생쥐스트(Saint-Just) 역시 "쥐메 제분소 고원"이라 불리는 약 180미터 높이의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6월 20일 프랑스군 전투 편제

프랑스군은 총 89,592명이었으며, 여기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뮐러(Muller) 사단 8,625명을 제외한 병력이 실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우익

마르소(Marceau) 장군이 지휘하며 다음 부대로 구성됩니다.

  • 마르소 사단(로르주·아르디 여단): 7,961명
  • 마예르(Mayer) 사단(프레스탈·르쿠르브 여단): 8,517명

이 익단의 우익은 오블레(Auvelais)와 코피오 숲 일대에서 상브르 강에 의지했고, 좌익은 랑부자르 근처 캉피네르(Campinaire)에 위치했습니다. 선봉대는 왕페르세볼레(Wanfercée-Baulet)와 벨렌(Velaine)을 점령했습니다.

중앙

중앙군은 세 개 사단으로 구성됩니다.

  • 르페브르(Lefebvre) 사단(르발·자코팽·술츠만 여단): 8,815명. 캉피네르에서 마르소 사단과 연결(우익)되었고 좌익은 바그넬레(Wagnelée)에 위치. 선봉은 플뢰뤼스에 주둔
  • 샹피오네 사단(르그랑·그르니에·르리방 여단): 9,088명. 우익은 바그넬레, 좌익은 에피니 주변. 선봉은 멜레(Mellet)와 생피아크르(Saint-Fiacre) 확보
  • 몰로 사단(올리비에·시몽 여단): 8,578명. 우익은 고슬리 앞, 좌익은 티메옹(Thiméon) 앞에 배치

중앙 예비대

  • 아트리(Hatry) 보병 예비대(샵살·보네 여단): 11,064명. 중앙 후방 랑사르(Ransart)에 배치
  • 두부아(Dubois) 기병 사단(솔랑·오풀 여단): 기병 2,713명. 역시 랑사르에 위치

좌익

세 개 사단으로 구성되며, 그중 뮐러 사단은 마뵈즈(Maubeuge)까지 상브르 강 방어를 위해 셰레르(Scherer) 장군에게 증원으로 파견되어 전투 당일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 클레베르(Kléber) 사단(뒤에스메·퓌지에·슐라흐터 여단): 9,969명. 우익은 고슬리 주변, 좌익은 쥐메 앞 고지에 배치되어 좌익의 제2선을 형성
  • 몽테귀(Montaigu) 사단(리샤르·퐁세·부아세 여단): 8,358명. 우익은 피에톤(Piéton), 중앙은 트라제니(Trazegnies), 좌익은 몽소 숲(몽소쉬르상브르)과 포르시(Forchies) 주변
  • 뮐러 사단(랑소네·슈발리에 여단): 8,625명. 전투에 불참

좌익 예비대

도리에(Daurier) 여단 5,904명이 퐁텐레베크(Fontaine-l'Évêque), 르른(Leernes), 웨스페(Wespe)에 배치되었습니다.

전투 손실

장드디외 술트(Jean-de-Dieu Soult)에 따르면 프랑스군 5,000명이 전력에서 이탈했고, 연합군은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연합군의 손실은 프랑스 측에 의해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발데크(Waldeck)에 따르면 연합군은 샤를루아 수비대 2,800명을 포함해 5,000명을 잃었습니다. 7월 4일, 코부르크 사령부가 있던 워털루에서 손실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플뢰뤼스에서 제국군의 손실은 전사 208명, 부상 1,017명, 포로 361명, 박격포 1문, 탄약차 3대, 군기 1면이었습니다. 역사학자 빅토르 세자르 외젠 뒤퓌(Victor César Eugène Dupuis)에 따르면 네덜란드군은 약 700명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