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파리 코뮌의 주역들: 누가 코뮌을 이끌었는가

코뮌 평의회 구성 선거

1871년 3월 26일, 파리 코뮌 평의회 의원 92명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독일군의 파리 포위전 전후로 파리를 떠난 시민들과 티에르를 따라 베르사유로 간 사람들(티에르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약 10만 명)이 있었기 때문에 기권률은 약 25%에 달했지만,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정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부유층을 대변하는 온건파 후보 약 20명이 당선된 점은 이 선거가 비교적 자유롭게 치러졌음을 보여줍니다. 동부와 북부 아롱디스망(10구, 11구, 18구, 19구, 20구)과 남부의 12구, 13구는 코뮌파 후보에게 압도적인 표를 던졌습니다. 반면 서부의 1구, 2구, 8구, 9구, 16구에서는 '질서당' 시장들이 내세운 후보(약 4만 표)가 승리했고, 기권율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실제로 의석에 앉은 의원은 70명에 불과했습니다. 온건파 당선자들의 빠른 사임, 파리에 머물 수 없었던 일부 인물(대표적으로 블랑키)의 부재, 중복 당선 등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코뮌 평의회는 노동자 계급과 파리 소시민층을 충실히 대표하는 성격을 지녔습니다. 직업별 구성을 보면 노동자 25명, 장인 12명, 사무직 종사자 4명, 상인 6명, 변호사 3명, 의사 3명, 약사 1명, 수의사 1명, 엔지니어 1명, 건축가 1명, 화가 2명, 언론인 12명이었습니다.

코뮌을 이룬 다양한 정치 세력

공화주의와 사회주의의 모든 정치 경향이 평의회에 고루 반영되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숭상하고 중앙집권을 지향한 '자코뱅파' 약 20명 가운데에는 샤를 들레클뤼즈, 펠릭스 피아, 샤를 페르디낭 감봉, 파스칼 그루세 등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약간 더 많은 '급진파'는 지방 자치와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지지했으며, 아르튀르 아르누, 샤를 아무루, 빅토르 클레망, 쥘 베르제레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블랑키파'는 약 10명으로, 선봉적 무장봉기를 신봉한 세력으로 장바티스트 샤르동, 에밀 외드, 테오필 페레, 라울 리고, 가브리엘 랑비에 등이 속했습니다. 사회 개혁을 추진한 '프루동파'로는 레오 프렝켈, 베누아 말롱, 외젠 바를랭 등이 있었으며, 쥘 발레스와 귀스타브 쿠르베 같은 '독립파' 인사들도 당선되었습니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갈등

이윽고 코뮌 평의회는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뉘었습니다. 다수파는 자코뱅파, 블랑키파, 독립파로, 이들에게는 정치가 사회보다 우선했습니다. 1793년 산악파(몽테뉴파)의 행보를 잇고자 했던 그들은 중앙집권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조치에도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코뮌이 통과시킨 모든 사회적 조치에는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5월 1일 공안위원회 창설을 45표 대 23표로 강행한 것도 바로 이들입니다.

소수파는 급진파와 프루동파 국제주의자들로, 사회적·반권위주의적 조치를 추진하며 '사회 공화국'을 지지했습니다. 두 진영의 대립은 4월 28일 공안위원회 창설 문제로 표면화되었습니다. 소수파는 공안위원회가 코뮌의 민주적·자치적 이상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력 다툼이 많은 파리 시민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두 진영은 즉각 함께 싸웠습니다.

정치적 열기, 클럽과 언론

이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파리 노동계급이 드러낸 놀라운 정치적 열기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3월 26일 코뮌 평의회 선거와 4월 16일 보궐선거 등 거듭된 선거가 정치적 긴장감을 유지했습니다. 공식 행사들 역시 집회의 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3월 28일 시청에서 열린 코뮌 평의회 출범식, 4월 중순 사회주의자 피에르 르루의 장례식, 티에르 저택의 파괴, 5월 16일 방돔 광장 기념탑 철거가 그 예입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수많은 클럽(정치 토론 모임)에 모여 상황을 논의하고 해결책을 제안했으며, 때로는 선출된 의원들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자치 행정을 도왔습니다. 다양한 장소에 마련된 이 클럽들은 정기적이든 비정기적이든 연사들을 통해, 특히 노동계급에게 유리한 새로운 사회 질서 수립이라는 대중의 요구를 목소리 낼 수 있게 했습니다. 클럽은 중심 지역(1구~6구)에 많았지만, 서부 파리의 부촌(7구, 8구, 16구)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클럽들은 5월 7일 연합체를 결성하여 코뮌 평의회와 보다 효과적으로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언론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기존 신문들 외에 코뮌의 70일 동안 70개 이상의 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그러나 4월 18일부터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기 시작했고, 5월 18일에는 공안위원회가 티에르 정부에 우호적인 신문들을 발행 금지했습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는 쥘 발레스의 『크리 뒤 푸플』(Le Cri du Peuple), 앙리 로슈포르의 『모 도르드르』(Mot d'Ordre), 파스칼 그루세의 『라프랑시』(L'Affranchi), 베르메르슈의 『페르 뒤셴』(Le Père Duchesne), 앙드레 레오 부인의 『라 소시알』(La Sociale), 펠릭스 피아의 『방죄르』(Le Vengeur), 그리고 『라 코뮌』(La Commune)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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