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는 로마 제국에 필적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끊임없이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단 한 명의 아들만 남았으니, 바로 경건왕 루도비쿠스(Louis the Pious)입니다. 그리하여 경건왕은 아버지의 영토를 통일된 채로 온전히 물려받게 됩니다.
그런데 경건왕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남 로타르(Lothair), 피팽(838년 사망), 대머리 카를(Charles the Bald), 그리고 막내인 게르만인 루트비히(Louis the Germanic)였습니다. 상속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경건왕은 817년 아헨에서 법령 문서인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을 반포합니다. 당시 상속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국을 남성 상속자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게르만식 전통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을 분할 불가능한 통일체로 보는 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경건왕은 양자의 절충안을 모색하여 장남 로타르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어린 동생들에게는 장남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결정은 동생들의 깊은 반감을 샀습니다. 839년에야 비로소 분할 합의가 성립되었지만, 동생들은 여전히 형에게 종속된 지위에 머물렀고 영토도 더 좁았습니다. 결국 840년 6월 29일 경건왕 루도비쿠스가 사망하면서 3년에 걸친 왕위 계승 전쟁의 포문이 열립니다.
주요 인물
- 대머리 카를(Charles the Bald)
- 게르만인 루트비히(Louis the German)
- 경건왕 루도비쿠스(Louis the Pious)
- 로타르(Lothair)
전개 과정
아버지가 사망하자 로타르는 839년의 합의를 무시하고 '제국 칙령'에 근거해 황제의 지위와 제국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세 형제 간의 갈등이 폭발했고, 각자 군대를 소집하며 무력 충돌의 국면으로 치닫습니다.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아키텐에 있던 대머리 카를은 왕좌에서 쫓겨난 피팽의 조카들을 계속해서 막아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반면 로타르는 크게 유리한 처지 덕분에 막강한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 유디트(Judith)의 현명한 조언에 따라, 카를은 루트비히와 화친하여 로타르에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841년 6월 8일 푸아세 지방의 폰트누아(Fontenoy-en-Puisaye)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로타르에게 참담한 패배로 돌아왔습니다. 승리에 고무된 대머리 카를과 게르만인 루트비히는 842년 2월 14일 스트라스부르 서약(Oath of Strasbourg)을 맺으며, 형과 따로 거래하지 않겠다고 서로 맹세했습니다.
이 서약에 힘입어 두 사람은 보물을 챙겨 달아난 형을 폐위시키기 위해 아헨으로 진군했습니다. 이후 842년 6월 마콩(Mâcon)에서 만나 분할 합의를 도출했고, 그 결과는 843년 8월 최종적으로 서명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은 경건왕 루도비쿠스의 영토를 영토적·경제적 측면에서 거의 균등한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장남 로타르는 중앙의 중프랑키아(Middle Francia), 대머리 카를은 서프랑키아(Western Francia), 게르만인 루트비히는 가장 동쪽의 영역을 각각 물려받았습니다.
영향과 결과
샤를마뉴가 일궈낸 방대한 제국을 분할한 이 조약은 황제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황제는 더 이상 다른 상속자들 위에 군림할 수 없이 왕국을 나누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타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망하자 중프랑키아는 소멸의 길을 걸었고, 두 동생은 조카들의 영토를 점차 잠식해 갔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교훈을 되새긴 이후의 왕조들은 제국이 다시는 해체되지 않도록 살릭법(Salic law), 즉 장자 상속제를 엄격히 적용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