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소총(Henry Rifle)은 1860년에 설계된 북미산 후장식 수동 연발 장총입니다. 사수가 방아쇠울(트리거 가드)을 아래로 당겼다 올리는 동작만으로 재장전이 이루어져 곧바로 다시 발사할 수 있으며, 예비 탄약은 총열 아래에 배치된 관형 탄창에 수납됩니다.
당대의 소총화기인 머스킷(단발식·전장식·뇌관식)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무기였지만, 미국 정부의 공식 채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 모델인 스펜서 소총(Spencer Rifle)과 마찬가지로 남북전쟁과 인디언 전쟁 기간 동안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기술적 특징
방아쇠울을 활용한 수동 연발 방식 덕분에 숙련된 사수는 2초마다 1발씩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분당 2~3발 발사에 그치던 전장식 머스킷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속도입니다. 여기에 관형 탄창에 16발을 수납할 수 있어, 헨리 소총은 당대 전장식 소총들을 크게 능가하는 화력과 발사 속도를 자랑하는 무기였습니다.
사용 탄약은 림파이어(rimfire) 방식으로, 구리(후기에는 황동) 탄피에 25그레인(1.6g)의 흑색화약이 담겨 있으며, 명목상 구경 .44(11mm)의 납탄 216그레인(14g)을 발사합니다.
작동 원리: 방아쇠울을 아래로 당기면 노리쇠가 열리고 새 탄약을 담은 급탄 부품이 올라오며, 약실의 빈 탄피가 배출되고 해머가 격발 준비 자세로 젖혀집니다. 방아쇠울을 다시 올리면 약실이 닫히면서 급탄 부품의 탄약이 약실로 들어가고, 탄창 내 스프링이 다음 탄약을 급탄 부품 위로 밀어 올립니다. 이로써 무기는 발사 준비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헨리 소총에는 안전상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해머가 '격발 준비' 위치에 있거나 '대기' 위치에 있을 때, 격침 바늘 끝이 항상 탄약의 가장자리에 닿아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해머에 충격이 가해지면 의도치 않은 오발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
헨리 소총의 설계자는 벤저민 타일러 헨리(Benjamin Tyler Henry)입니다. 그는 1850년경 '볼케이닉 연발소총(Volcanic Repeating Rifle)'을 개량했습니다. 이 소총은 헨리 소총과 유사한 기구를 사용했지만, 탄피 없는 탄약(화약과 뇌관이 탄두 밑바닥에 위치)을 사용해 탄도 성능이 부족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862년 가을, '뉴헤이븐 암즈 컴퍼니(New Haven Arms Company)'는 이 신형 소총 900정을 제작했으며, 1864년에는 월 290정을 생산했습니다. 1866년 헨리 소총의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약 14,000정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정부의 공식 채택을 받지 못한 헨리 소총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값비싼 무기'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제공했지만 탄약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헨리 소총은 대규모 부대보다는 정찰병, 기습대, 산병, 측방 경계 임무 등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손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남군 입장에서 '16연발 사수'와 마주하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남군 병사들은 헨리 소총을 "일요일에 장전해서 일주일 내내 쏘는 저 저주받은 양키 소총"이라고 불렀습니다.
남군은 헨리 소총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포획에 성공하더라도 탄약이 금방 바닥나곤 했는데, 구리가 부족하여 해당 규격의 탄피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루이지애나, 텍사스, 버지니아의 여러 남군 기병 부대와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의 호위대가 sporadically 헨리 소총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소총은 대규모로 운용되지는 않았지만, 근접 거리에서 집중적이고 신속한 화망으로 승패를 결정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임을 입증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인 1864년 11월 30일, 테네시주 프랭클린 전투에서 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북군 2개 연대는 존 벨 후드(John Bell Hood)가 이끄는 20,000명의 남군 정면 돌격을 대규모로 격퇴했습니다. 남군은 최악의 패배 중 하나를 겪었으며, 이 패배는 이후 내슈빌(Nashville)의 참패로 이어졌습니다.
인디언 전쟁 기간에도 헨리 소총의 역할은 컸습니다. 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미국 육군 소규모 분견대의 연발 사격은 인디언 전사들의 대규모 집단에 맞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레드 클라우드 전쟁(Red Cloud's War) 중이었던 1867년 8월 1일 와이오밍주 포트 필 커니 인근의 건초밭 전투(Battle of Hayfield)와 다음 날 벌어진 왜건 박스 전투(Battle of Wagon Box)가 대표적입니다.
1876년 6월 25일 리틀 빅혼 전투에서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거둔 압도적인 승리 역시, 그들이 헨리(그리고 스펜서, 윈체스터) 같은 속사 소총을 일부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제7기병연대 병사들은 단발식 스프링필드 M1873 '트랩도어' 카빈총(결함이 많다고 알려짐)과 리볼버만을 장비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