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레이쇼 허버트 키치너: 영국 제국을 상징한 원수
호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흔히 '로드 키치너(Lord Kitchener)'로 불린 그는 1850년 6월 24일 아일랜드 케리주 발리롱퍼드에서 태어나 1916년 6월 5일 오크니 제도 앞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영국의 원수이자 정치인입니다.
유년기와 청년 시절
키치너는 중령 헨리 호레이쇼 키치너(1805~1894)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프랜시스 앤 셰발리에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자녀였습니다. 어머니는 낭트 칙령 폐지로 프랑스에서 추방된 프랑스계 개신교도(위그노)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1864년 어머니의 결핵 치료를 위해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지만, 어머니는 같은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제네바의 프랑스 학교에서 수학했고, 1868년 영국 울리치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디낭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 군대에 자원입대했지만, 영국의 중립 노선에 반해 참전한 탓에 간호병으로만 복무할 수 있었고 귀국 후에는 군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코트뒤노르 지방 대대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나기 전 폐렴에 걸려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논란 속의 영웅
1871년 1월 4일 왕립공병대 장교가 된 그는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이집트 등지에서 여러 차례 복무하며 아랍어를 익혔습니다. 1874년에는 콘더(Conder) 장교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지도 제작 임무를 맡았습니다. 1875년 갈릴리 지방 사페드에서 현지 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1881년부터 1885년까지 진행된 그의 측량 성과는 해당 지역 최초의 근대식 지도로 출판되었습니다.
1884~1885년에는 마흐디 전쟁 중 하르툼에 고립된 찰스 고든(Charles Gordon) 장군 구출 원정에 참여했지만,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 고든 장군은 살해당했습니다. 그러나 1892년 이집트군 총사령관(시르다르)에 임명된 그는 1896년 수단으로 다시 진격하여 1898년 하르툼을 탈환하고 고든 파샤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이 원정은 1898년 9월 2일 옴두르만 전투의 화려한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키치너는 대영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군 지도자로 부상하며 수단 총독에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을 한층 높인 두 번째 사건은 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의 마르샹(Marchand) 대위와 맞선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 즉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은 키치너를 명성의 절정에 올려놓았습니다. 1902년 귀국 후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1914년에는 백작(Earl)에 올랐습니다. 이후 인도군을 지휘하며 대대적으로 재편성하고(1902~1909),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이집트 총영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대영제국 최고의 자리인 인도 총독직을 꿈꿨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원주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경력은 그를 진정한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로드 키치너는 근대전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입니다. 특히 마흐디 기병대에 대한 맥심 기관총의 체계적인 활용과, 제2차 보어 전쟁 중 최초의 강제 수용소 설립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수용소 운영과 보어 농장 파괴 결정은 로이드 조지, 찰스 트레블리언 등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모병 포스터
1914년 8월, 그는 육군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바사노(Alexander Bassano)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모병 포스터는 수많은 자원입대자를 불러모았습니다. 영국군은 단기간에 15만 명의 직업군인에서 150만 명 이상의 동원 병력으로 확대되었고, 석 달 만에 200만 건의 자원 입대 신청을 받아냈습니다. 1916년 1월 징병법 시행 이후에는 병력이 3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갈리폴리 전역의 실패와 포탄 선택의 실수(유탄보다 산탄포를 선호한 것)로 대중의 신뢰가 다소 흔들렸지만, 그는 여전히 큰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친독 성향의 신 페인(Sinn Féin)이 그를 동성애자로 매도하는 언론 공세를 준비했으나, 스코틀랜드야드가 이를 사전에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이드 조지 등 정치인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정치인들은 그의 능력과 인기에 반감을 품었고, 결국 그는 군수 담당 및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사임을 원했지만, 국가의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득에 사임하지 못했습니다.
미스터리로 남은 죽음
키치너는 1916년 6월 5일 배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영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으며,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는 로이드 조지가 지시한 암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입증된 적은 없습니다.
그는 러시아 방문 임무 도중 사망했습니다. 1916년 6월 5일, 오크니 제도 북서쪽 해상에서 왕립해군 순양함 HMS 햄프셔호가 러시아 제국으로 향하던 중 U-75 잠수함이 마릭 헤드(Marwick Head)에서 약 2km 떨어진 해역에 부설한 독일 기뢰에 충돌한 것입니다. 배는 즉시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15분 만에 침몰했습니다. 66세의 로드 키치너는 차가운 바다에서 얼어 죽느니 배와 함께 가라앉기를 택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습니다.
곧 영국 정치권이 껄끄러운 군인을 제거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드 조지가 영국 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키치너가 평소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일이었습니다. 로이드 조지가 스코틀랜드야드를 통해 키치너의 일정을 독일과 아일랜드(신 페인) 정보기관에 흘렸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1926년 백서가 발표되어 소문을 잠재우려 했지만, 논란은 끝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키치너의 가혹 행위에 분노했던 프리츠 주베르 뒤켄(Fritz Joubert Duquesne) 역시 자신이 배후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