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부채 사건(팬 어페어): 알제 침공의 도화선이 된 1827년 프랑스와 알제의 외교 분규

부채 사건이란 무엇인가

터키계 파샤 후세인 데이(Hussein Dey)와 프랑스 영사 피에르 드발(Pierre Deval) 사이에 벌어진 '부채 사건(팬 어페어)'은 1827년 프랑스 왕립 해군이 알제를 해상 봉쇄하게 만든 전쟁 명분(casus belli)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양국 간에 누적되어 있던 경제적·외교적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프랑스의 미지급 채무

1800년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 당시, 두 유대인 상인 부스나흐(Busnach)와 자코 바크리(Jacob Bacri)가 프랑스 총정부(Directory)에 프랑스군에 밀을 공급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계약이 체결되었고, 알제의 데이가 이 사업 전체에 필요한 자금을 선불로 지급했다. 그러나 총정부의 금고는 텅 비어 있었고, 대금 지급은 연기되었다.

나폴레옹은 집권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채무 상환을 계속 미루었다. 왕정복고 시기에 이르러 루이 18세 정부는 총액의 절반을 갚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법적 중재 절차에 따라 동결된 상태로 남았다. 결국 대여로부터 30년이 지난 1830년에도 알제의 데이는 돈을 받지 못한 채였다.

외교 분규의 발단

1827년 4월 30일, 데이는 알현 자리에서 프랑스 영사 피에르 드발을 접견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에게 보낸 세 통의 "우호적인" 서신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영사가 국왕은 답변할 수 없다고 말했고, 데이에 따르면 "이슬람 종교에 대한 모욕적인 말"까지 덧붙였다(데이가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이에 분노한 데이는 그를 "가벼운 파리채로 두어 번, 세 번" 쳤다.

따라서 실제로 뺨을 때리거나 부채로 얼굴을 친 일은 없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외교가 활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듯한 구실에 가까웠다. 데이가 사과를 거부하자 프랑스는 이를 전쟁 명분으로 간주했고, 함대를 파견하여 알제 항구의 봉쇄에 나섰다. 이러한 외교적 갈등의 고조는 결국 1830년 알제 원정으로 이어졌다.

알제 데이에 대한 최후통첩 (1827년 6월)

1827년 6월, 프랑스 정부는 알제에 두 개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첫 번째 사절단은 드발 영사와 프랑스 국민 전원을 알제에서 철수시키는 임무를, 두 번째 사절단은 알제 데이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철수 임무는 1827년 6월 11일 스쿠너선 '라 토르슈(La Torche)'호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그 직후 '라 프로방스(La Provence)'호에 탑승해 도착한 콜레(Collet) 대위는 협상 임무를 담당하는 해군 분견대를 이끌었다.

파리와 알제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자, 사르디니아 영사 다틸리 드 라 투르(Datili de la Tour)가 중재자 역할을 맡아 데이에게 24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봉쇄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이었다.

최후통첩이 요구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데이를 제외한 섭정정부(레겐시)의 모든 고위 인사가 '라 프로방스'호에 승선하여, 섭정정부 수반의 이름으로 프랑스 영사에게 사과해야 한다.
2. 합의된 신호에 따라 데이의 궁전과 모든 요새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고, 101발의 예포로 이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3. 프랑스의 재산으로서 섭정정부의 적대 선박에 실려 있는 물품은 종류를 불문하고 향후 압수될 수 없다.
4.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선박은 더 이상 알제 해적(코르사르)의 검문을 받을 수 없다.
5. 데이는 특별 조항을 통해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카피툴라시옹)이 알제 왕국에서 집행되도록 명령해야 한다.
6. 토스카나, 루카, 피옴비노 및 교황령의 신민과 선박은 프랑스 국왕의 직접적인 신민으로 간주되고 대우받아야 한다.

파샤 후세인 데이는 이러한 굴욕적인 조건이 담긴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알제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3년에 걸친 이 봉쇄는 끝내 알제 정복 전쟁으로 번지며 북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