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피우수프스키의 대담한 반격 계획: 바르샤바 전투의 승부를 가르다

전세의 역전: 다시 강해진 폴란드군

밀려드는 붉은 군대에 짓밟힐 것처럼 보였던 폴란드군은, 사실 전역 내내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소련군은 양 전선에서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이 15만 명에 미치지 못할 만큼 위축된 반면, 폴란드군은 8월 20일을 기준으로 총 37만 명에 육박했다. 물론 이들은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열악했으며, 그중 기병은 2만 8천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8월 12일에는 이미 18만 5천 명이 지정된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다.

피우수프스키가 그린 반격의 청사진

팽창하는 병력을 무기 삼아, 유제피우 피우수프스키(Józef Piłsudski)는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역공을 명령했다. 훗날 프랑스의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 장군이 이 계획의 입안자로 지목되곤 했지만, 사실 이 작전은 피우수프스키가 혼자 설계한 것이 분명하며, 로즈보도프스키 장군과 함께 세부 사항을 다듬은 결과물이었다.

8월 6일, 피우수프스키는 바르샤바 남쪽 약 95km 지점, 비프르(Wieprz) 강 유역에 타격 부대를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투하쳅스키가 바르샤바를 북쪽에서 포위하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판단은 적절했다. 바르샤바 상류의 브크라(Wkra) 방어선은 양 진영을 통틀어 가장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지휘관으로 평가받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Władysław Sikorski) 장군의 제5군(2만 6천 명)에 맡겨졌다.

작전의 골격: 남쪽에서 시작되는 대포위

바르샤바 수비대는 4만 6천 명 규모로, 제1·제2군과 예비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남쪽의 타격 집단은 제3군과 제4군(합계 4만 8천 명)의 호응을 받았다.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글리(Edward Śmigły-Rydz, 훗날 1939년 패전의 와중에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 소환되는 인물)가 지휘하는 2만 명의 부대는 남부 전선에서 차출된 부대, 특히 기병 여단 2개를 동반한 제1·제3군단(Legion)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8월 17일, 이 부대는 소련군 모지르(Mozyr) 병단 방면으로 진격하여, 투하쳅스키가 북쪽에 배치한 모든 군을 향한 대규모 포위 기동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이 거대한 선회 기동의 외곽선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와 비아위스토크까지를 감싸는 것이었다.

베이강과 래드클리프, 그리고 오해받은 공

요컨대 피우수프스키는 베이강의 조언에 따라 남쪽 병력을 차출했고, 그 부대가 반격의 선봉이 되었지만, 베이강 자신은 계획 수립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폴란드군이 이토록 야심 넘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리라 그가 믿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프랑스 고문단의 래드클리프는 더욱 회의적이었다. 그는 투하쳅스키가 바르샤바 포위를 시도할 것임을 간파하고, 도시 수비대를 동원해 적의 선회 기동 측면을 먼저 타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저 외국인 관찰자에 불과했던 그는 사태의 흐름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고, 결국 피우수프스키의 대담하고 비정통적인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감행된 위험, 스스로 인정한 무모함

이 작전의 실행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병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약 일주일간이 곧 결정적인 허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우수프스키 본인조차 이 기동을 두고 “모든 논리와 올바른 군사 원칙에 반한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발견됐지만 믿어지지 않은 계획서

흥미롭게도 투하쳅스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소련 제12군 병사들은 첼름 인근에서 전사한 폴란드 장교의 시신에서 피우수프스키의 반격 계획서를 발견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제1·제3군단 사단은 남부 전선에서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북방 공세의 선봉에 설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였다. 결국 투하쳅스키는 노획한 계획서를 위조품으로 단정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병사들의 높은 사기 덕분에, 우리는 승리를 확신할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