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벅시 시겔: 라스베이거스의 탄생을 이끈 전설적 갱스터

벅시 시겔: 라스베이거스를 건설한 갱스터

벅시 시겔: 라스베이거스의 탄생을 이끈 전설적 갱스터
벅시 시겔(Bugsy Siegel, 1906년 2월 26일 뉴욕 브루클린 ~ 1947년 6월 20일 로스앤젤레스)은 미국 조직폭력계에서 활약한 유대인 갱스터입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부부 사이에서 벤저민 시겔바움(Benjamin Siegelbaum)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별명인 '벅시(Bugsy)'는 '제정신이 아닌 자'라는 뜻으로, 그의 격정적인 기질을 잘 보여주는 별명이었습니다(그의 앞에서 이 별명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적들에게는 잔혹했지만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를 지녔으며, 특히 라스베이거스의 발전과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유년기와 갱스터의 시작

벅시 시겔은 뉴욕 브루클린의 가난하고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윌리엄스버그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다섯 자녀 중 둘째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노점상들에게 돈을 갈취했고, 굽히지 않는 상인들의 가게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후 마이어 랜스키(Meyer Lansky)를 만나 두 사람은 '벅스 앤 마이어 갱'을 결성하는데, 이는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 갱단에 맞선 유대인 갱단이었습니다.

시겔과 랜스키의 관계는 이후 범죄 신디케이트 내내 특별한 유대감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은 흔히 한 사람의 근육과 대담함, 다른 사람의 두뇌와 신중함이 결합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갱단에는 이후 조직범죄계의 유명 인사가 된 렙케 부할터(Lepke Buchalter), 더치 슐츠(Dutch Schultz), 뉴저지 최대의 갈취꾼이 된 애브너 '롱기' 즈윌먼(Abner "Longie" Zwillman) 등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갱단은 갈취 외에도 미국 금주법 시대에 주류 밀매를 전문으로 삼았습니다. 벅시 시겔은 노조가 더 많은 돈을 지급하지 않는 한 파업파괴자로 고용되기도 했고, 때때로 청부 살인업자로도 활동했습니다.

살인청부업자로서의 명성

갱단의 세력이 커지면서 1920년대 초, 조 마세리아(Joe Masseria)가 이끄는 강력한 마피아 패밀리의 위협과 압박에 직면하게 됩니다. 행운의 루치아노(Lucky Luciano)가 그 패밀리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잠시 숨통을 틔워주었습니다. 한편 시겔은 갱단 동료들과 함께 아놀드 로스스타인(Arnold Rothstein)의 밀주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그의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은 조 마세리아 소유의 화물이며 왁시 고든(Waxey Gordon)에게 배달 예정이었던 물자를 강탈하는 대담무쌍한 작전을 주도하게 만들었습니다. 1931년에는 루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의 지시에 따라 마세리아 암살 작전에 가담합니다.

1930년대에는 미국 마피아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조직범죄 내 암살 전문 부서인 '머더 인코포레이티드(Murder Incorporated)'의 구축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1934년에는 검사 토머스 듀이(Thomas Dewey)의 집요한 추궁에 몰려 보스에 대한 증언을 할 위험이 커진 오랜 친구이자 더치 슐츠의 심복인 보 와인버그(Bo Weinberg)를 직접 살해해 이스트 리버에 수장시켰습니다. 또한 1930년대 초에는 보스 살바토레 마란차노(Salvatore Maranzano)의 명에 따라 루키 루치아노를 제거하려던 청부살인자 빈센트 '미친 개' 콜(Vincent "Mad Dog" Coll)도 처형했으며, 탈세 혐의로 수감된 왁시 고든의 지시로 폭탄을 던져 마이어 랜스키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파브라초(Fabrazzo) 형제의 목숨도 거두었습니다.

캘리포니아행

1937년, 시겔은 검사 토머스 듀이의 표적이 되었고 뉴욕에서의 입지는 날로 위태로워졌습니다. 신디케이트는 그를 제거하는 대신, 마이어 랜스키의 권유에 따라 조직의 영향력이 거의 닿지 않던 캘리포니아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범죄 분야는 로스앤젤레스 이탈리안 갱의 수장 잭 드라그나(Jack Dragna)와 분배되었는데, 도박은 드라그나가, 노조 장악은 시겔이 담당했습니다.

시겔은 파트너 모 세드웨이(Moe Sedway)와 부하 미키 코언(Mickey Cohen)과 함께 영화 산업 종사자들(기술자, 엑스트라 등)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대형 스튜디오들을 갈취할 수 있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갱스터 역할로 유명했던 어린 시절 친구, 배우 조지 래프트(George Raft)와 재회하기도 했습니다. 래프트는 그를 화려한 파티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타급 인물로 급부상한 시겔은 배우들과의 스캔들을 양산했습니다. 진 하를로(Jean Harlow)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스튜디오에 이어 그는 곧 영화 스타들을 직접 상대로 갈취를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초, 시겔은 시카고의 '더 아웃핏(The Outfit)'이 소유한 전국 단위 경마 베팅 정보망인 '트랜스 아메리카(Trans America)'의 서해안 확장을 주도하여 잭 라건(Jack Ragan)의 '컨티넨털 와이어 서비스(Continental Wire Service)'를 몰아냈습니다. 라건은 같은 도시에서 암살당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무렵 언론은 머더 인코포레이티드와 연루된 그의 혐의를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시겔은 갱스터로서 전국적인 악명을 얻게 됩니다.

라스베이거스와 플라밍호

1945년, 벅시 시겔은 사막 한가운데 외딴 마을처럼 남아 있던 라스베이거스에 주목했습니다. 네바다주는 바로 그 시기 도박과 내기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참이었습니다. 시겔이 카지노를 지은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1946년 그가 건설한 호화로운 시설 '플라밍호(Flamingo)'는 한적한 사막 한복판에 엔터테인먼트 오아시스를 세우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합법적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비친 이 프로젝트는 신디케이트의 눈길도 끌었고, 마이어 랜스키를 통한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조직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던 시겔은 순식간에 막대한 자금을 잃었고, 600만 달러가 넘는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목격자들은 시겔의 정부 버지니아 힐(Virginia Hill)이 현금이 가득 담긴 서류가방을 들고 스위스를 오갔다고 증언했습니다. 하바나 회의에서 신디케이트는 마이어 랜스키의 초기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겔의 처형을 결정합니다. 플라밍호가 수익을 내기 시작하던 1947년 6월 20일, 벅시 시겔은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했습니다. 범인의 신원은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살해당한 지 몇 분 만에 랜스키의 부하들이 플라밍호에 도착해 지배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많은 의심을 낳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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