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칼리프 알리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 페르시아 세밀화, 1837년 © ROLAND AND SABRINA MICHAUD / AKG
사파비 왕조와 시아파의 선택
1736년까지 이어진 사파비 왕조를 개창하며, 신비주의적 기운을 지닌 '푸른 눈의 샤'라 불린 이스마일 1세(재위 1501~1524)는 시아파를 제국 전체의 공식 종교로 선포하는 과감한 첫 수를 두었다. 그는 이 결정이 종교와 정치의 영속적인 결합을 낳는 동시에,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동쪽의 우즈베크가 지배하는 수니파 중심의 무슬림 세계 안에서 이란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고히 다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분열의 배경
이 오래 지속될 결과를 낳은 선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선 근본 원인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7세기 무함마드가 중동을 이슬람화하는 과정에서 아랍인이든 아니든 모든 주민은 자발적이든 강제든 하나의 이슬람 깃발 아래 통합되었다. 그러나 632년 예언자가 사망하자, 이집트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둘러싸고 부족들의 패권 다툼이 되살아났다.
'정통 칼리프(라시둔)'라 불리는 네 명의 칼리프가 차례로 집권했다. 첫 번째 칼리프이자 예언자의 동반자였던 아부 바크르는 634년 병으로 사망했고, 다음 두 사람은 암살당했다. 644년의 오마르, 그리고 656년의 우스만이 그들이다. 네 번째 칼리프이자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남편인 알리는 659년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 폐위가 무슬림을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놓는 분열의 기점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661~750)의 초대 칼리프 무아위야(재위 661~680)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두 진영이 충돌했다. 하나는 우마이야 왕조를 인정하는 다수파 수니파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부정하는 소수파 시아파였다. 시아파에게 알리는 무함마드의 당연한 후계자였으며, 이 특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661년 알리가 암살당하고, 680년에는 알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후세인이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되며 시아파가 참패하자, 그의 가문은 다마스쿠스 수니파 정권의 추격을 피해 이란으로 피신했다. 이렇게 하여 이란에서는 알리를 지지하는 강력한 운동, 곧 시아파(아랍어 '시아'는 '당파, 추종자'라는 뜻)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란 시아파는 열두 명의 이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 이맘의 계보는 873년 열두 번째 이맘 무함마드의 '실종', 즉 은둔으로 끊겼다. 그는 아직 살아 있으나 숨겨져 있다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 지상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올 존재다. 그가 바로 메흐디, 즉 숨겨진 이맘이자 '시간의 주인'이다.
차별성의 확립
한편 현대 무슬림 세계의 다수파인 수니파는 코란의 메시지와 함께, 예언자와 그 동반자들의 구전 기록이 담긴 하디스의 전통, 곧 수나를 따른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시아파처럼 지도자가 아니라 코란을 읽고 주석하는 사람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6세기, 최초의 사파비 군주 샤 이스마일의 즉위는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12세기에 시작된 영적 운동의 부상에서 비롯되었다. 격동의 시기였던 당시 한 스승, 셰이크 자헤드 길라니는 점점 더 많은 수피들을 자신의 주위로 모았다. 엄격한 무슬림 사회에서 미움받던 수피즘은 금욕과 세상의 포기,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을 향한 개인의 영적 승화를 설파했다. 스승의 빼어난 제자였던 사피 앗딘은 그의 딸과 결혼한 뒤 이 모임의 수장이 되었고, 이 서클은 곧 사파비예(사파비) 교단으로 발전했다.
자헤드가 시아파였던 만큼 사파비 왕조 역시 시아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영적 목표에 몰두했지만, 이내 패권을 향한 야망이 더해졌다. 그 정점에 이스마일 1세의 대관식이 있었다. 그에게 국교로서의 시아파는 이중의 전략적 지렛대였다. 모든 이란인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도구인 동시에, 대부분 수니파인 이웃인 오스만과 우즈베크에 맞서 자신들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정치적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란인의 시아파 개종은 폭력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실제로 타브리즈 같은 일부 변경 지역에서는 바그다드 칼리프, 셀주크, 튀르크·몽골 계열 지배 세력들의 영향으로 수니파가 우세하여 격렬한 저항이 빚어졌다. 그리하여 이스마일은 때로 상당한 잔혹함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시아파 교육을 병행하며 백성들을 같은 종교적 깃발 아래 묶어냈다.
선전포고
정치적 차원에서 이스마일은 자신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재위 1512~1520)가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 세계 전체를 자신의 수니파 깃발 아래 통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선택은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게다가 몇 년 사이 이란은 오스만과 우즈베크의 지배 아래 있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며, 아랍 정복 이전인 6세기 사산 제국의 국경선을 회복해냈다.
우즈베크는 비교적 빠르게 격퇴되었지만, 오스만에 대해서는 사정이 달랐다. 셀림 1세는 먼저 자국 내에 거주하던 40만 시아파의 학살을 명한 뒤 이란 영토를 공격했다. 1514년 8월 22일, 찰드란에서 양군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우리는 모두 승리하거나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이스마일은 선언했다. 그러나 8월 23일 저녁, 이란의 패배는 완전한 것이었다. 이란인들은 이 패배를 곧 민족의 건국 신화로, 불경한 적을 상대한 최고의 희생을 노래하는 찬가로 재해석했으며, 시아파를 자신들의 차별성을 보증하는 정치·종교적 자산으로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