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인은 기질적으로 '동화시키는 민족'이다. 자신에게 맞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남에게도 좋다고 여기는 성향이 있다. 개인이나 작은 사회 집단, 소수 민족 집단이라면 아주 호의적으로도 쉽게 동화시킨다. 그러나 유색 인종 6천만 명을 불과 4천2백만 프랑스인에게 동화시키는 것처럼 방대한 규모의 동화가 몰고 올 결과는 가늠하기 어렵다. 앞서 그는 망설여진다. 이를 탓할 수는 없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연합(association)'의 길로 결연히 나아가야 마땅하다.
협약의 정신과 정반대로 가는 현실
그러나 실제로는 책임 있는 프랑스 관료들이 보호령 국가들 안에서 점점 더 '직접 통치'를 강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조약의 정신과 문자 어느 쪽으로 보든,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된 연합 정책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지금 두 개의 행정부에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하나는 침투하고 지배하며 전능해진 프랑스 행정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친척'이라는 형용조차 과분할 만큼 위축된 토착 행정부다. 모로코, 튀니지, 안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이러한 상황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이런 처사가 불러오는 불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렇듯 무시당한 군주들뿐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고 행정 출로를 차단당해 일거리 없이 방치된 현지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커진다. 그들은 실무 운영에서 멀어진 채 시간만 많으니, 프랑스의 행보를 곱씹으며 비판할 겨를이 넉넉해진다.
본능처럼 남아 있는 동화주의 경향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우리의 행정적·법률적 성향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여전히 동화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인을 우대하는 반면, 그가 속한 공동체 — 예전에는 전지전능했던 바로 그 공동체 — 를 희생시킨다.
학교는 우후죽순 늘어난다. 재능 있는 학생들은 중등 교육으로, 더 우수한 이들은 대학 과정으로 진학한다. 교육, 치안, 교통·통신 시설, 언론, 서적, 라디오 방송은 새로운 생각이 어디에서 왔든 널리 퍼지도록 돕는다. 문제는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판별하는 능력이 아직 미약하다는 데 있다.
무너지는 부족의 틀
부족이라는 틀은 붕괴하고 있고, 족장의 권위는 무너져 내린다. 심지어 가부장의 권위마저 크게 줄어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흑인 아프리카에서든 인도차이나에서든, 기독교 선교단의 활동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통적인 종교 관습을 잠식한다. 요컨대 정신과 조상 대대로 이어온 사회 전반에 걸친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의문부호를 받고 있다.
"신비에 기반한 공동체 사회에서, 국가라는 틀을 지닌 자본주의 사회로 옮아가고 있다."
각성하는 민족주의, 깊어지는 실망
이렇듯 모든 조짐은 현지 민족주의의 각성 혹은 재각성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프랑스인, 백인 탓으로 돌리고, 과거의 '좋은 옛날',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꿈을 꾼다. 그 시절이 얼마나 깊은 비참함과 자의, 피비린내 나는 무정부 상태였는지 대체로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보일 뿐이다.
가장 실망이 깊은 이들은 '개화된' 계층이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동화주의에 호응했지만, 정식 시민이 아니라 프랑스 '신민'에 불과했다. 어디서든 자발성과 심지어 호의로 반갑게 맞이받는다는 느낌이 들어도, 프랑스 사회 안에서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결국 밖에 머물 수밖에 없다.
권력의 지렛대 어디에도 그들을 세우지 않는다. 이렇게 프랑스와 새롭게 성장한 현지 엘리트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