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바르텔레미(Saint Barthélémy)"는 일본군의 기습 발생 시 프랑스 부대에 이를 알리기 위해 정해진 경보 코드명이었다. 그러나 도시와 주요 거점에서 기습의 성패는 예측 불가능한 여러 변수에 좌우되었다.
사이공은 신속히 제압당했지만, 코친차이나의 일부 수비대는 결연히 맞서 싸웠다. 사이공 북동쪽의 투다우못(Thu Dau Mot)과 바삭 강변의 라이붕(Lai Vung)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노이 요새의 44시간
하노이에서의 반응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요새는 폐쇄형 복합 시설이었고, 경보 해제 신호가 늦은 시각에 방송된 덕분에 상당수 병력이 아직 막사에 있었다. 카두(Cadoux) 중령과 다르장스(d'Argence) 중령의 지휘 아래 저항 조직이 신속히 구축되었고, 건물 하나하나, 층층이 방어전이 벌어졌다. 일대십의 절망적 열세 속에서 전투는 무려 44시간 동안 이어졌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살아남은 프랑스 병사들, 그중 부상자 300명에게 군례를 갖춰 보내며 예우했다.
다른 거점들의 저항
다른 막사와 주둔지의 저항 양상은 제각각이었다. 중앙 통신 시설이 있던 페리(Ferrie) 막사는 여러 차례 공격을 격퇴한 끝에 3월 10일 새벽 5시경에야 함락되었다. 완전히 고립된 한 개 고사포 분견대는 밤 11시까지 싸운 뒤 홍강 기슭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행군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어 고사포 부대에 배속되었던 병사들은 북부 라오스를 두 달간 도보로 횡단한 끝에 중국에 도달했다. 하노이 남쪽 10km 지점의 하동(Hà Đông) 역시 48시간 넘게 일본군의 공격을 버텼다.
후에: 포위와 게릴라전
후에는 공격이 밤 10시경에 시작되어 기습은 실패했는데, 하노이에서 이미 경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제10식민혼성보병연대(R.M.I.C.) 제2대대를 소탕하기 위해 공격측은 포병과 항공력까지 투입해야 했고, 전투는 48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대대는 인원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고, 민간인의 지원을 받아 두 개의 게릴라 부대를 꾸렸다. 약 250명의 프랑스인과 현지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들은 콘툼 산악대대와의 합류에 실패한 뒤, 후에 남서쪽의 아투아트(Atouat) 산괴로 집결했다.
그러나 안정적인 보급도 의약품도 없이, 무더위에 질식할 듯한 안남 산맥의 숲을 며칠씩 고되이 행군하며 매복과 교전을 견디던 이들은 끝내 무너졌다. 한 부대는 6월 3일 사라반느(Saravane) 남동쪽 50km 지점의 반 샤반(Ban Chavanne)에서, 다른 부대는 며칠 뒤 역시 사라반느 근교에서 흩어져 소멸했다.
빈(Vinh)에서는 수비대(1개 중대)의 저항 덕분에 소규모 집단이 탈출할 수 있었지만, 이들 역시 3월 24일부터 일본군에 의해 섬멸당했다.
'정글로 들어가다' — 탈출 집단의 비극
코친차이나, 캄보디아, 안남 거의 모든 곳에서 소규모 집단들이 일본군의 포획망을 피해 "정글로 들어가"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장도 장비도 열악하고 훈련도 부족했으며, 서로 간에도 외부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돈과 식량, 의약품 없이 보급을 기대할 길이 없는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기후와 질병에 굴복했다. 인도차이나의 정글은 무장하지 않은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말라리아와 아메바성 이질이 도처에 만연해 가장 강건한 사내도 며칠 만에 쓰러뜨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숲거머리와 '부마크(boumacs)'라 불리는 작은 흡혈곤충은 다리에 화농성 종기를 일으켜 세심하고 오랜 치료 없이는 낫지 않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집단도 있었다. 코친차이나의 토르텔(Tortel) 형제 무리가 그러한데, 이들은 일본 패전 후 베트민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연합국의 지원 중단과 체널트의 증언
인도차이나의 저항 집단들은 캘커타에서 날아올 구원의 낙하 물자를 기다리며 종종 지쳐 있었다. 영국은 성실하게 노력했지만, 발화 연기만으로는 작은 집단의 위치를 찾아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나쁜 현지 기상 조건, 광범위한 산불, 예기치 않은 일본군 전투기 초계 같은 변수도 있었다. 영국왕립공군(R.A.F.)은 이미 기체 성능의 한계에 가까운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는 처지였기에, 아무리 큰 위험을 감수해도 조악한 투하 지점(D.Z.)을 오래 찾아 헤맬 여유가 없었다.
미국 측도 일부 임무(특히 지상 지원)를 수행했는데, 이는 제14미국육군항공대 사령관이자 옛 '플라잉 타이거스'의 지휘관인 체널트(Chennault) 장군의 개인적 결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임무는 워싱턴의 명령으로 곧 중단되었다. 체널트는 회고록에서 마치 "미국 정부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축출되기를 바라, 그들이 식민지와 헤어지기 쉽도록" 모든 일이 진행된 것 같다고 적었다. 실제로 3월 9일 이후 인도차이나 저항 세력에 지원될 무기·탄약·식량·의약품을 실은 항공기들은 워싱턴의 지시를 기다리며 지상에 머물렀고, 그 지시는 끝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