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를린 장벽의 역사: 냉전의 상징, 건설에서 붕괴까지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세워졌으며, 28년 후인 1989년 11월 9일 마침내 철거되었습니다.

이 장벽은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둘로 가른 장치였습니다. 그리하여 1961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나뉘어 지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기원

베를린 장벽의 존재를 이해하려면 먼저 냉전(1945~1991)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난 직후 시작된 지정학적 대립으로, 자본주의 진영을 이끈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을 이끈 소비에트 연방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승전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은 패전국 독일을 분할 점령했습니다. 특히 수도 베를린에서는 이러한 분단 구조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세 국가가 베를린마저 함께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정치·경제적으로 같은 진영, 즉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 있었고, 이들 세 나라는 '삼국 공동 점령 지역'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스탈린이 점령한 소련 점령지를 위협한다고 여겨 그의 큰 불만을 샀습니다.

1948년 스탈린은 '베를린 봉쇄'를 선포했습니다. 육로와 수로를 통한 물자 공급을 차단해 서베를린을 굶기는 일종의 '평화적인' 포위 작전이었죠. 이에 미국과 영국은 항공기를 동원해 물자를 공급하고 수송을 보장하는 대규모 공수작전으로 맞섰습니다.

봉쇄는 1949년 5월 13일에 풀렸고, 연합군은 계속 베를린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 23일, 연합국은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을 수립함으로써 스탈린이 독일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에 맞서 소련은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베를린과 장벽

독일 전체가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면, 수도 베를린은 더욱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옛 수도였던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문자 그대로 둘로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베를린 장벽의 역사: 냉전의 상징, 건설에서 붕괴까지

장벽의 총 길이는 약 155킬로미터에 달했으며, 그중 24킬로미터는 강 위를, 30킬로미터는 숲을 지나갔습니다. 또한 8개 노선의 근교 열차와 4개 노선의 지하철 운행을 끊었고, 193개의 거리와 대로를 차단했습니다.

장벽은 경보 장치가 설치된 울타리, 전기 철조망, 가시 철사로 방어되었고, 300여 개의 감시탑이 즐비했으며 경비견과 무장한 병사들이 끊임없이 순찰을 돌았습니다. 병사들은 장벽을 넘으려는 사람에게 발포해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일부 건물은 장벽 건설의 직접적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894년에 세워진 화해교회는 공산권 주민만 출입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고, 1980년대에는 장벽 옆에 이른바 '죽음의 지대'를 조성하기 위해 동독 정부가 1985년 이 교회를 철거해 버렸습니다.

소피 묘지 역시 찢겨나간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묘지는 동베를린 주민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일부 구역이 잘려나가면서 여러 유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단의 상징이 된 거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베르나우어 거리(Bernauer Straße)'입니다. 길이 1.4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거리는 장벽이 거의 전체를 덮었고, 인접 건물들의 창문은 벽돌로 막히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1961년 8월 22일, 동베를린에서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한 주민이 3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가 추락해 사망한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을 넘은 탈출 시도

추정에 따르면 약 118명이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다른 112명은 총격을 받거나 높은 곳에서 추락했지만 요행히 살아남아, 동독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약 7만 명과 함께 붙잡혔습니다.

반면 5,075명은 이 모든 장애물을 뚫고 서독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건설

베를린 장벽의 역사: 냉전의 상징, 건설에서 붕괴까지

1960년 이전까지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의 탈출은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하루 평균 2,000명 정도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자본주의 진영으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1961년, 추가 탈출을 막기 위해 동독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1893~1973)는 베를린 시내 양측 무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봉쇄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1년 8월 13일, 훗날 냉전의 궁극적인 상징이 될 거대한 장벽의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매일 수천 가족이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장벽의 반대편에 갇혀 서로 만날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1961년 10월 27일에는 한 돌발 사건으로 인해 미군 전차가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에서 소련군 전차와 마주 섰습니다. 다행히 어느 쪽도 발포하지 않았고, 상황은 외교적 경로를 통해 무사히 해결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베를린 장벽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합니다.

1963년, 베를린을 방문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과의 연대를 다짐하는 기념비적인 연설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두 독일 간의 외교 관계는 10년 후에야 재개되었고, 그동안 소련과 미국은 냉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소련과 동구권 위성국들은 경제적·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었고, 이에 따라 체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개방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이 장벽을 허물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한편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점진적인 개방과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 국경 양쪽에서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동독 정치인들은 TV 방송을 통해 국경 개방을 발표했습니다.

동유럽권 내부에서도 여러 나라가 조심스러운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예컨대 1989년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독일인들이 대거 서독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개방 날짜가 발표되지 않자, 1989년 11월 9일 수많은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가 망치 등 연장을 들고 직접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장벽의 완전한 철거는 결국 불도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베를린 장벽의 일부는 독일 수도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예술가들의 벽화로 채워진 갤러리가 되었고, 또 일부는 이 끔찍한 건축물이 결코 잊히지 않도록 하는 기념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독과 서독은 베를린 장벽 붕괴 11개월 후인 1990년 10월 3일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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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비 경쟁
  • 미하일 고르바초프

참고 자료

베를린 장벽의 사실과 수치, 도이체 벨레(Deutsche Welle). 열람일: 2020년 6월 25일.

스페인어 다큐멘터리: Los años del Muro – 분단된 베를린의 삶. 열람일: 2020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