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마지막 최후통첩: 1945년 3월 9일, 일본의 인도차이나 기습

마지막 최후통첩: 1945년 3월 9일, 일본의 인도차이나 기습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레지스탕스는 프랑스군 내부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물자와 병력을 싣은 낙하 투하는 곳곳에서 이루어졌고, 그 비밀을 완전히 감추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진짜든 허풍이든 수많은 계획이 소문으로 흘러나왔고, 베트남인들은 이를 귀담아듣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지막 최후통첩: 1945년 3월 9일, 일본의 인도차이나 기습일본 당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곧 감지했다. 모든 징후는 프랑스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켰다. 반면 연합국이 안남 해안이나 중국 남부에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1945년 1월,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 참모본부는 프랑스 측에 요구하던 재정 분담금의 대폭 증액을 강요했고, 자국 병력을 6만 명까지 늘렸다.

연합군과 손잡은 프랑스 임시정부

아시아 전역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거듭되는 가운데, 프랑스 임시정부(GPRF)는 동남아시아 해방 전투에 참여해야만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움직였다. 블레조(Blaisezot) 장군의 지시에 따라 개입 부대가 편성되었고, 이들은 동남아시아 사령부(SEAC) 총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 제독의 지휘 아래 배치될 예정이었다.

한편 극동 프랑스 연락부(S.L.F.E.)는 연합국과 긴밀히 협조하여,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에 대한 타격과 프랑스의 귀환을 준비하는 비밀 작전을 맡았다. 칼커타와 중국 윈난성의 쿤밍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3월 9일 밤, 최후통첩

일본군 참모본부의 불안은 갈수록 커져갔다. 도쿄로부터 인도차이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일본은 1945년 3월 9일, 마쓰모토(Matsusmoto) 대사를 총독 드쿠(Decoux) 제독에게 파견했다. 시각은 밤 8시였다. 일본 대사가 제출한 마지막 최후통첩은 단 하나, 프랑스군을 일본군의 지휘 아래 두라는 것이었다.

드쿠 제독은 회피적인 답변으로 시간을 끌며 상황을 판단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그날 밤 곧바로 공격에 나섰다. 이것이 훗날 '명호 작전'으로 불리게 되는, 일본의 인도차이나 무력 점령이었다.

기습과 영웅적 저항

사이공과 남부 거의 전역에서 기습은 완벽했다. 프랑스 부대들은 순식간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와 하노이 등 다른 지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미리 경보를 받고 일본군에 영웅적인 저항을 펼쳤으며, 일본군 역시 그들의 용맹에 대해 군례를 갖추어 화답할 정도였다.

그 외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본군은 공격 전의 세련된 배신과 공격 후의 잔혹한 학살로 스스로를 망신시켰다. 프랑스군은 무력화되었고, 극소수의 병력만이 게릴라전을 벌일 산악 지대로 빠져나가거나, 하롱베이 혹은 일본군이 점령하지 않은 중국 영토의 일부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고난의 철수, 그리고 좌절

가브리엘 사바티에(Sabattier) 장군과 에메 알레상드리(Alessandri) 장군의 지휘 아래 6천 명의 병력은 긴 고난의 행군 끝에 북부 고원 지대에 도달했고, 프랑스 임시정부는 그들에게 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나 몇 주 뒤, 미국이 물자 지원을 거부하면서 이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도차이나 영토를 포기하고 중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중국은 물론 그들을 환영했지만, 무장을 해제당한 채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질 격변에 개입할 어떤 수단도 없이 방치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