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사담 후세인: 이라크 독재자의 생애와 몰락

사담 후세인은 1979년 이라크 대통령에 오른 20세기의 대표적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고, 쿠르드족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으며, 2003년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권력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유년 시절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는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북부 도시 티크리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알아우자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넉 달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자료들은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어머니 수바 툴파 알무살랏은 임신 기간 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마저 암으로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낙태와 자살을 시도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했다고 전해집니다.

후세인이 태어난 후 어머니는 그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숙부 카이룰라 툴파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숙부는 그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며 성장에 필요한 모든 보살핌을 주었습니다. 툴파는 또한 후세인이 교육받고 정계에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정치 활동

20세가 되던 해,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20세기 후반 이라크 역사를 좌우할 정당에 합류했습니다. 바트당은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1950년대 이라크로 전파된 정당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내세워 유럽 식민 지배에 반대했고, 아랍 민족들의 하나의 국가로의 통합을 주장했습니다.

후세인은 1957년 당에 입당했고, 다음 해인 1958년 이라크 왕정이 전복되었습니다. 공화국으로 전환된 새 정부 안에서 바트당은 여러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이 쿠테타는 바트당의 지원을 받던 압드 알카림 카심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트당과 카심의 관계는 틀어졌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제안한 통합 계획을 카심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나세르의 구상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영토를 포괄하는 거대한 아랍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카심의 거부로 바트당은 그를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은 카심 암살 음모를 꾸몄고,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지도자 암살 작전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암살 계획은 1959년 10월에 실행되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실패의 책임과 위험 부담 때문에 후세인과 다른 바트당원들은 이라크를 탈출해야 했습니다.

후세인은 시리아로 피신해 몇 달간 머문 뒤 이집트로 옮겨 3년간 체류했습니다. 그의 귀환은 1963년 초 이라크에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카심 정권은 압드 살람 아리프가 주도한 쿠테타로 무너졌습니다.

이 쿠테타는 바트당의 지원을 받았기에, 1959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3년 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아리프가 자쿠테타(셀프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바트당의 지원은 끝나게 된 것입니다.

후세인은 지하 활동을 벌여야 했고, 바트당의 실패한 쿠테타 시도에도 참여했습니다. 아리프는 당에 대한 탄압을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은 1964년 10월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수감 생활은 길지 않아 1966년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탈옥 후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권력 다툼에 본격적으로 매진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라의 주도권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바트당 소속이었습니다. 당시 이라크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동생인 압드 라흐만 아리프였습니다. 이 시기에 사담 후세인은 바트당 지도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68년 7월, 후세인은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주도한 쿠테타에 가담했습니다. 이 쿠테타로 아리프는 이라크에서 추방되었고, 드디어 바트당이 이라크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아흐메드 알바크르가 이라크 대통령이 되었고, 사담 후세인은 국가의 실질적 2인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독재자로서의 사담 후세인

1968년부터 1979년까지 후세인은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이 기간 동안 권력과 명성을 굳건히 다졌습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이라크 사회가 분열로 향하는 강한 경향을 파악했고, 이것이 나라의 정치 불안정을 심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곧 어떤 형태의 정치적 반대 세력과도 싸우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탄압은 사회 전반은 물론 바트당 내부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또한 이라크 인구를 감시하고 반대 운동이 세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경찰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더 많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이라크 경제의 현대화와 발전에 투자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라크 경제는 강해졌고, 정부는 지역 내 몇몇 나라만 제공하던 복지 혜택을 국민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사담 후세인은 반대 세력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감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권력 구조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요컨대 철저한 권위주의 정부였던 것입니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은 알바크르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며 공식적으로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후세인은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하며 폭력적인 통치자였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할랍자 마을에 살던 쿠르드족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공격은 1988년에 일어났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 마을 주민들이 이란군을 지원한 것에 대한 독재자의 보복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그의 정권에 재앙이었습니다. 10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냈고, 이란을 패배시키지 못했으며, 전쟁 비용으로 이라크 경제는 크게 피폐해졌습니다.

후세인이 일으킨 또 다른 분쟁은 걸프전입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석유 문제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진 빚을 놓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1990년 쿠웨이트 침공이 단행되면서 미국이 이라크에 맞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개입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신속히 종결시켰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관계는 영원히 훼손되었습니다.

말년

앞서 언급했듯이 걸프전 이후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의 테러는 미국의 중동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행보는 더욱 개입주의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라크처럼 미국에 적대적인 정부들은 주요 위협으로 간주되어 미국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그러한 무기가 없었기에 미국의 주장은 허위였습니다.

어떤 경우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2003년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권력을 포기하고 바그다드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몇 달간 은신 생활을 이어갔지만, 미군에게 아드다우르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반인도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처형은 2006년 12월 30일 집행되었으며, 그의 최후는 교수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