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히틀러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 협정마저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명령했고, 슬로바키아가 독일의 괴뢰 '독립국'으로 분리되면서 국가 자체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흔히 체코슬로바키아군은 독일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뮌헨 협정 이전부터 이미 국경과 주데텐 지역에서 양측 모두 사망자를 낸 심각한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투는 오늘날 체코 모라바-슬레스코 지방의 작은 도시 프르지데크미스테크(Frýdek-Místek)에 있던 차야네크 병영에서 벌어졌습니다.
항복 명령이 닿지 않은 병영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약 6개월 전인 1939년 3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습니다. 폴란드가 선점할 가능성을 우려해 산업 중심지 오스트라바 일대를 조속히 확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군대에 무장 해제를 명령하고 해당 지역의 통신을 끊어버린 덕분에 독일군은 저항 없이 신속히 진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렐 파블리크(Karel Pavlík) 대위 휘하 3개 중대가 주둔하던 차야네크 병영에는 항복 명령이 끝내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프르지데크미스테크 점령 임무는 '아돌프 히틀러' 호위부대(LSSAH)의 증원을 받은 독일 제8보병사단이 맡았으며, 실질적인 진격은 제84보병연대가 주도했습니다. 독일군은 3월 14일 오후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한때 이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가 건설한 구식 병영, 차야네크 캠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병영에는 독일계·헝가리계·슬로바키아계 병사들이 탈영해 단 250명의 체코 병사만 남아 있었습니다. 대다수는 입대한 지 겨우 14일밖에 되지 않은 신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이끈 것은 제12중기관총중대장 카렐 파블리크 대위였고, 마르티네크(Martinek) 중위를 비롯한 30여 명의 장교들도 그의 지휘 아래 있었습니다.
차야네크 병영 전투
독일군 종대가 병영으로 접근해 인근에서 멈춰 섰습니다. 한 독일 장교가 병사들을 데리고 정문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대장 보후슬라프 프르지빌라(Bohuslav Přibila)는 독일군에게 멈출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장교는 권총을 든 채 부하들과 함께 계속 문 앞으로 행진했습니다. 결국 체코 병사가 경고 사격을 했고, 독일군은 즉각 사격으로 응수해 그를 부상시켰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부상당한 몸으로 반격하여 독일 장교를 쏘아 쓰러뜨렸습니다.
총성을 들은 파블리크 대위는 즉시 병력을 동원해 두 개 참호에 배치했습니다. 그는 예견처럼 미리 병영 안에 참호를 파두라고 명령해둔 상태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2층 창문에도 병사들을 배치했습니다. 병영의 화력은 소수의 기관총과 소총, 수류탄 50발, 대전차소총 1정이 전부였습니다.
독일군은 약 1,200명의 병력을 전개하고 Sd.Kfz 221 장갑차의 지원을 받으며 정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장갑차는 대전차소총에 무력화됐고, 체코 병사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해 독일군 여럿을 살상했습니다. 곧 독일군은 확성기로 항복을 권유했지만, 대전차포와 5cm·8cm 박격포로 증강된 상태에서 감행한 두 번째 공격 역시 손실만 남긴 채 물러나야 했습니다.
얼마 후 독일군은 세 번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번에는 참호에서 체코 병사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병사들은 승산이 없음을 알면서도 건물 안에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이어진 약 40분간의 격전에서 독일군은 두 번째 장갑차까지 투입했고, 파블리크 대위는 건물 옥상에서 홀로 기관총을 조작하며 놀라운 전과를 올렸습니다.
한편 독일군은 그 지역의 체코군 최고지휘관인 엘리아스베르크(Eliasberk) 대령을 불러 수비대 설득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파블리크 대위는 항복 명령을 묵살하고 계속 싸웠습니다. 전투는 밤새 이어졌고, 독일군은 포와 박격포로 병영을 집중 포격했습니다. 체코 병사들은 버텼지만 탄약이 급속히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파블리크 대위는 휴전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체코 병사들은 독일군에 의해 무장 해제된 뒤 풀려났습니다. 파블리크 대위 역시 부하들을 따랐고, 독일군은 그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하며 권총 소지를 허락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18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한 반면, 체코군 부상자는 단 2명에 불과했습니다.
영웅의 비극적 최후
파블리크 대위와 마르티네크 중위는 거의 즉시 레지스탕스에 합류했습니다. 파블리크 대위는 체코 조종사들의 영국 탈출을 도왔고, 이후 프라하로 거점을 옮겨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배신을 당해 독일군에 붙잡혔고, 끝내 입을 열지 않자 끔찍한 고문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라는 지옥으로 끌려가 1943년 10월 학살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