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3월 10일 이후,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일본은 프랑스의 주권 원칙을 문제 삼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지우고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 주력했다. 일본 헌병대(켐페이타이) 요원들은 '대동아' 건설 계획에 따라 프랑스의 축출을 준비하고, 프랑스의 귀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바오다이의 독립 선언
안남의 황제 바오다이는 일본의 판에 가장 먼저 올랐다. 그는 1945년 3월 11일 발표한 포고문을 통해 프랑스와 체결했던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바오다이는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고, 이를 잘 알던 일본 측은 민족주의자로서 프랑스 당국과 갈등을 빚어온 인물들을 권력으로 밀어 올렸다.
곧이어 공식 권력의 무능함, 일본군의 만행, 행정 조직의 붕괴에 더해,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교통망과 항만 시설의 파괴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낳았다. 이어진 대기근은 특히 통킹 지역 주민들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겼다. 이러한 혼란은 혁명 선전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고, 반체세력 활동에 유리한 토양이 되었다. 베트민(Viet-Minh)은 바로 이 상황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베트민의 부상
1941년 베트남 북부 변경 지역에 모인 여러 베트남 혁명 운동 세력, 특히 해산된 인도차이나 공산당 출신 인사들은 같은 해 5월 찐쯔(Tsin Tsi) 회의에서 '베트남 독립 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 줄여서 '베트민'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했다.
바로 이 베트민이 음지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호치민의 지도 아래 베트민은 1945년 3월 9일 일본의 쿠데타가 만들어낸 정세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을 찾았다. 일본 파시즘과의 투쟁만이 목적이라는 인상을 꾸민 베트민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쉽게 위장할 수 있었고, 호치민을 이미 잘 알고 있던 미국인들의 호감과 지원을 얻어 무기와 고문관까지 확보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자신의 영토로 피신했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추적하고 호치민마저 한동안 구속했던 터였지만, 이번에는 한동안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프랑스 임시정부와의 접촉
베트민은 프랑스 측과도 관계를 맺으려 했다. 정확히는 베트남 사람들이 '새로운' 프랑스인이라 부르기 시작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대표들과의 접촉을 시도한 것이다. 1945년 7월, 호치민은 쿤밍으로 5개 항목의 메모를 보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가져야 할 미래의 입지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개략적으로 제시했다.
나는 당시 쿤밍에서 프랑스 극동 연락 기구(S.L.F.E.O.)의 중국 지부인 '미션 5(Mission 5)'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에 참여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가 이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며, 그 결과 옛 보호 대상이던 베트남 사람들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게 될지를 미리 가늠해 두는 것이야말로 나의 임무였다.
수수께끼의 인물, 호치민
그 수수께끼 같은 인물 호치민에 대해 우리는 이제 막 알기 시작했다. 그가 다름 아닌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바이앙-쿠투리에(Vaillant-Couturier)와 카생(Cachin)과 함께했던 혁명가 응우옌아이꾸옥(Nguyen Ai Quoc)이며, 1924년에서 1925년 사이 중국에서 보로딘(Borodin)의 충실한 협력자로 활동했던 바로 그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랜 망명과 게릴라 생활 끝에 그는 '밝히는 이'라는 뜻의 중국식 이름 호치민으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