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탕트(détente, '긴장 완화')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냉전의 양극 체제가 맹렬한 군비 경쟁에서 협상과 공존으로 선회한 시기를 가리킵니다. 핵 협정 체결, 유럽에서의 화해,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은 이 시기를 특징짓는 세 가지 축이었습니다.
핵 협정
세계를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을 되새긴 미국과 소련은, 투명성의 정신에 입각해 '상호확증파괴(MAD)'에 기반한 균형을 함께 관리하기로 결심합니다.
1963년 6월부터는 크렘린과 백악관을 연결하는 상설 텔레타이프 회선, 이른바 '붉은 전화'가 가동되어 양국이 즉시 협의하고 '절벽 끝 외교'를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대기권 및 수중 핵실험을 금지하는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되자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고, 소련조차 이 젊은 대통령을 애도했습니다. 뒤를 이은 린든 존슨은 데탕트 노선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안타깝게도 자국을 베트남 전쟁의 늪으로 이끌게 됩니다.
1968년 1월, 제네바 군축위원회에 제출된 미소 공동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핵확산방지조약(NPT)이 체결되어, 미국과 소련은 영국과 함께 핵무기와 핵기술을 비핵보유국에 이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72년 5월,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서명한 SALT I(전략무기제한협상) 협정은 양국의 방어용 요격미사일(ABM) 기지를 각각 두 곳으로 제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기지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공세적 핵전력을 5년간 동결했습니다.
1979년 6월, 카터와 브레즈네프는 1974년부터 SALT I의 연장선에서 협상해 온 SALT II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이 협정은 다탄두미사일(MIRV) 발사체의 동결과 핵무기에 대한 상호 검증을 규정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 상원의 비준이 무산되었습니다. 다만 양측 모두 조항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화해의 동기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첫째, 핵무기 보유량이 이미 '과잉 살상 능력(overkill)'에 도달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데다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군비경쟁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컸습니다. 둘째,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전에 직면했고, 중소 분열은 삼각 외교 체제 속에서 중미 화해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셋째, 경제 침체에 빠진 소련은 외부 원조가 절실했는데, 미국은 이를 정치적 합의와 연계시켰습니다(헨리 키신저의 '링키지' 전략). 마지막으로 미국 역시 국가 예산의 과도한 몫을 집어삼키는 베트남 전쟁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양국은 '적대적 동반자'(레몽 아롱)로서 냉전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려 했습니다.
유럽 속의 데탕트(1962~1975)
친소 진영이든 친미 진영이든, 두 진영 내부에서는 강대국에 대한 반발이 커져갔습니다. 동유럽에서는 소련 모델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고,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프라하의 봄은 좌절됩니다. 서방에서는 드골이 미국과 NATO로부터 거리를 두었습니다.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서독 총리로 취임하면서 동구권과의 화해·개방을 추구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했습니다. 양 독일은 1972년 서로를 승인하고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베를린 장벽을 넘나드는 일도 점점 쉬워졌습니다.
1975년에는 소련을 포함한 33개 유럽 국가(캐나다와 미국 포함)가 헬싱키 최종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 협정은 국가 간 협력,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 인권 존중을 목표로 했습니다.
제3의 행위자, 중화인민공화국
공산 진영의 겉보기 결속은 이념과 외교 문제를 둘러싼 충돌, 즉 중소 분열로 인해 균열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중소 국경분쟁 당시 두 거대 국가 간의 전쟁 위험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베이징이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오쩌둥은 미국에 접근하기로 선택합니다. 소련과의 지리적 인접성이 미국보다 훨씬 큰 위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던 미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다가섰습니다. 중국은 이미 핵무장 경쟁에 뛰어든 상태였습니다(1964년 10월 16일 원자폭탄, 1967년 6월 14일 수소폭탄 실험). 닉슨은 특히 제3세계에서 소련을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1971년 4월 10일 미국 탁구 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이른바 '핑퐁 외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25일, 미국의 압박 속에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여 타이완을 제외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부여했습니다(찬성 76표, 반대 35표, 기권 17표). 이어 마오쩌둥의 초청을 받은 닉슨 대통령이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내 상당수 인구와 행정부의 반미 감정에도 불구하고 미중 간 전략·경제 관계는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중소 국경 지대에 에셜론 감청망의 두 청취 기지가 설치되었으나, 톈안먼 광장 시위 진압 사건으로 이 협력은 종식되었습니다.
'긴장 완화'의 한계
양대 강국은 여전히 중대한 분쟁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양국은 제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영향력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주변부 분쟁(peripheral conflicts)'이라고 부릅니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 전쟁은 스탈린주의 북베트남과 자본주의 남베트남을 통해 강대국들이 간접적으로 맞서는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1962년부터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습니다.
미국은 소련 진영을 봉쇄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수많은 독재자를 지원하고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1970년 캄보디아, 1973년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카스트로 정권이 이러한 독재정권에 맞서 혁명 게릴라를 지원했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