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팽창주의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굴욕과 카터 대통령의 평화주의 노선으로 국제 무대에서 위상이 흔들린 미국을 틈타, 소련은 아시아·아프리카·남미는 물론 유럽(유로미사일 위기)에서까지 영향력 확장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동시에 신세대 무기를 계속 배치하며 서방의 기술적 우위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귀환! (1981)
미국에서는 외교 정책이 재앙적이라는 비판 속에, 경제 위기 관리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음에도 카터가 로널드 레이건에게 선거에서 패배했습니다. 레이건(1981~1989)과 부시(1989~1993) 행정부 하에서 미국은 청교도적 도덕성과 경제 자유주의라는 전통적 가치로 회귀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데탕트를 부인하며 냉전을 재점화했는데, 레이건은 복음주의자 전국 대회에서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습니다. 이후 니카라과(1981~1986), 그레나다(1983) 등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개입이 잇달았습니다.
군비 경쟁, 공포의 균형과 그 붕괴
군사적 목적에서 여러 나라는 생존과 지배, 즉 지정학적·경제적 우위 확보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장비를 갖추어 갔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에 대한 우위를 과시하려고 필사적으로 파괴 무기를 축적했으나, 기술 진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군비 경쟁은 결국 소련 경제에 군수산업복합체가 안긴 과도한 부담으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경쟁 과정에서 양국은 적대 세력 사이에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에 크게 반대하는 어떤 상대든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고를 보유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상호 확증 파괴가 보장된 상황에서 양국은 '공포의 균형', 즉 핵 충돌이 일어나도 승자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1983년 3월 23일, 로널드 레이건은 IDS(전략방위구상), 이른바 '스타워즈'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고비용의 컴퓨터 기반 '우주 방패'로 핵무기를 요격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군비 경쟁을 포기하고 협상에 응했습니다. 이후 클린턴은 1993년 IDS를 철회했고, 부시 주니어는 2001년 12월 이를 다시 추진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전쟁
아프리카에서는 1975년 이후 구 포르투갈 식민제국에서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앙골라, 모잠비크 등)에서 공산 게릴라가 권력을 장악했고, 쿠바군의 지원을 받으며 남아프리카 방면으로 군사 작전을 확대해 특히 나미비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1976년부터 소련 붉은 군대와 쿠바군이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독재에 맞서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개입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의 콜웨지 구출 작전처럼 이러한 불안정화 시도가 좌절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럽의 미사일 위기
이 시기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강화와 함께 유럽 등 새로운 영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된 시기로 특징지어집니다. 이러한 팽창은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이어진 유로미사일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NATO는 소련의 SS-20 미사일에 대한 균형점으로 순항 미사일과 퍼싱 2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국가들의 공산당이 지원하는 대규모 평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차라리 붉은 것이 낫다(Rather red than dead)'는 구호가 내걸렸고,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평화주의는 서방에 있고, 미사일은 동방에 있다"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미사일들은 결국 1985년부터 배치되었고, 기정사실화된 상황 앞에서 소련은 협상에 나섰습니다. 이는 1988년 5월 27일 양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를 합의한 미소 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폴란드 문제
폴란드는 소련의 약화와 공산주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1978년 10월 16일, 카롤 보이티와가 요한 바오로 2세로서 제262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그는 하드리아노 6세(1523년 서거) 이후 처음으로 선출된 비(非)이탈리아 출신 교황이었으며, 국제 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습니다.
* 1980년 8월 31일, 금속노동자 레흐 바웬사가 자유노조 '연대(Solidarność)'를 창설했습니다. 서방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의 가혹한 군사 체제(1981년 12월 13일, 바르샤바) 수립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이 노조를 지지했습니다.
첫 번째 아프가니스탄 전쟁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성향의 친소련 국가였으나, 아프간 이슬람주의 세력이 현 정권과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모스크바가 붉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첫 번째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분쟁에 개입하여 현지의 반소 저항 세력에 자금을 지원하고, 소련 점령에 맞서는 이슬람 '성전사' 무자헤딘 집단에 군사 훈련을 제공했습니다. 소련군은 결국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습니다.